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ngswann May 25. 2018

나는 왜 여행하는가

프로 방황러의 방황을 위한 방황 예찬


여행 좋아하세요?

라고 물어봤을 때 아니라고 답할 사람이 있을까. 세계여행이 흔하고 인생을 바꿔놓은 각종 여행기가 넘쳐나는 시대. 사실은 외출보다 집에 있는 걸 선호하는 방콕러들에게도 여행은, 최소한 해외여행은 좋아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린 듯 하다. 그래야 지루하지 않고 모험심 넘치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물론 나도 입버릇 처럼 여행 예찬을 일삼는 사람들 중 하나다.


그러던 어느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여느 일요일 처럼 방구석에서 굴러다니다가 생각했다. 나는 왜 여행을 좋아하는가. 아니 진짜 좋아하기는 하는건가. 내 방 침대가 이렇게나 좋은데? 


보통의 일요일, 내 모습

여행에 대해 쓰려고 보니 문득 '여행'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진다. 일단 국어사전에서 '여행'을 검색해봤다(이런 원초적인 접근이라니!). 나그네 '려'에 다닐 '행'. 나그네가 되어 다닌다는 뜻. 그렇다면 나그네는 무슨 뜻인가 보니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 잠시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이란다. 단어의 의미를 알고나니 어쩐지 구름모자 쓰고 길 위를 떠도는 나그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쩌다 나는 길 위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을까.


로드무비가 심어준 환상

손바닥 만 한 책상 하나가 생활 반경의 전부였던, 딱딱한 의자에 하루 최소 10시간을 앉아 교과서와 칠판의 내용을 꾸역꾸역 머리에 쑤셔넣던 십대 후반. 내 인생의 반짝이는 시기를 왜 이렇게 답답하게 보내야 하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하루하루가 지겹고, 외롭지만 친구는 별로 만들고 싶지 않던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영화와 음악 그리고 밤마다 쏟아지는 생각을 쏟아내던 일기장이었다. 거의 하루종일 이어폰을 귀에서 빼지 않고, 밤마다 깜깜한 기숙사 침대에서 영화를 두 편씩 보던 시절. 그 시절 닥치는대로 봤던 영화들 중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작품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델마와 루이스>, <노킹 온 헤븐스 도어>, <길 위에서>와 같은 로드무비였다. 갇혀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자유를 찾아 떠나는 '길 위의 삶'이라는 이미지가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조금만 견디면 나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에 그 시절을 견뎠다.


책으로도 영화로도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줬던, 잭 케루악의 <On the Road>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모범적'인 삶의 모습이 있고,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낙오자 취급 받는 분위기에 답답함을 느꼈다. 죽어라 공부 해서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아이 기르다 생을 마감하는 건가? 이렇게 똑같이 살 거면 왜 이렇게 고생해서 공부해야 하는거지? 얼굴 생김새가 다 다르듯 삶의 생김새도 다른 게 정상 아냐? 이런 질문을 던지며 교복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던 나에게, 교복을 벗어던지고 떠난 여행은 익숙한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세상에 너무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줬다. 일 년 중 6개월은 요리하며 돈을 벌고, 나머지 6개월은 번 돈으로 세계를 여행하며 사진을 찍는 이탈리안 셰프, 치앙마이에서 떡볶이 집을 운영하며 주말엔 동남아 각지로 여행 다닌다는 한국인 부부, 3년 째 세계 구석구석을 떠돌며 글 쓰고 다음 영화의 영감을 찾아다니는 뉴질랜드의 단편영화 제작자... 떠나지 않았으면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을 삶들과의 만남. 삶에 모범답안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원하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살아가면 되는 걸.


그 길로 안 가도 괜찮아

운전면허도 무서워서 아직 엄두를 못내고 있을 정도로 '길치'라는 단어로는 설명하기에 부족한, 정말이지 형편없는 방향감각을 가진 나에게 길을 잃는 건 일상이다. 일상에서 길을 잃으면 그저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이 길어져 답답하고 비효율적일 뿐이지만, 목적지가 없거나 있어도 계속 바뀌는 여행지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멋진 순간들이 찾아왔다. 여행자의 마인드를 가진 뒤에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조금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을 불안해 하지 않게 되었다. 다른 길로 가면 좀 어때, 길 좀 잃으면 어때. 


베트남에서  원래 가려던 곳을 지나쳐 잠시 머문 달랏에서 경험한 캐녀닝. 멋진 기억과 수많은 멍을 선사해줬다.


이렇게 말하면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닌 탐험가 같지만, 사실 그리 많은 곳을 여행한 건 아니다. 그저 시간과 경제상황이 허락할 때 고민하며 (때로는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 해) 비행기표를 끊었고, 딱 그만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떠났던 몇 차례의 여행은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가끔 떠오르는, 인생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선사해 주었다.

음악에 취해있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었는데 머리 위로 별들이 쏟아지던 빠이의 레게 페스티벌
길에서 평소 좋아하던 유투버를 보고 무작정 쫓아 들어가 말 걸었던 LA 헐리우드 중심가의 스타벅스
쇼팽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벤치에 앉아 쇼팽 얼굴이 새겨진 보드카를 홀짝였던 바르샤바의 오후
메콩강을 건너 라오스로 넘어가는 슬로우 보트에서 만난 노르웨이 형제와의 영화 토론  


두고두고 담아뒀다 가끔씩 꺼내어 볼, 나만이 기억할 순간들.


한량들의 천국이자 여행자의 개미지옥 빠이. 하룻밤 묵어 가려다 자그마치 2주를 갇혀있었다.

인생도 게스트하우스 처럼

다른 건 몰라도 배낭 여행에서 고수했던 스타일 중 하나는 웬만하면 호텔보다는 게스트하우스나 카우치서핑 등을 이용해 현지인 또는 다른 여행자들과 만날 수 있는 곳에 묵는거였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 외에도 요즘은 1, 2인실 등이 잘 구비된 곳이 많아 분리된 공간에 묵으면서도 공용 공간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호텔은 깨끗하고 편리해서 좋지만, 다른 여행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는 점이 항상 아쉬웠다. (이런 비즈니스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호텔 라운지에서 원하는 투숙객들을 연결해주는 프로그램!) 


나는 언제나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궁금했고, 그러다보니 다양한 도시에서 다양한 게스트하우스에 묵었고, 참으로 가지각색인 게스트하우스의 매력에 푹 빠졌다. 교토의 고즈넉한 게스트하우스와 루앙프라방의 침대는 돌덩이였지만 창 밖 경치가 끝내줬던 게스트하우스, 앞뜰에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던 샌프란시스코의 게스트하우스와 푸른 협재 바다가 보이는 제주의 게스트하우스는 디자인도 분위기도, 심지어 묵는 사람들의 색깔도 달랐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게스트하우스는 주인과 똑 닮는다는 것이다. 드레드락을 한 주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선 어김없이 레게음악이 흘러나왔고, 만화 캐릭터를 닮은 주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의 책장엔 만화책이 가득했다.


이렇게 게스트하우스는 사람을 닮았지만, 삶도 닮았다. 


멕시코시티에서 묵었던 카우치서핑 하우스에서 밤 새 음악 듣고 얘기 나누다가 늦잠 자서 다음 행선지로 가는 버스를 놓쳐 시간이 붕 떴을 때 썼던 글을 (스페인어를 못하는 것에 대한 한탄 부분은 제외하고) 옮겨본다. 

우연히 가 닿은 곳에서 우연히 만나는 매력적인 사람과의 인연. 나는 우연과 불확실성이 이끄는 만남에 끌린다. 뻔하고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것은 재미 없다. 낯선 풍경의 매력. 끊임없이 경계를 무너뜨리고 넓히고 확장하는 삶. 여행을 하면서 지금 나는 지구(세계지도)의 어디쯤에 있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카우치서핑은 정말 획기적인 서비스다. 게스트하우스도 그렇고. 게스트하우스라는 컨셉,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어찌 보면 우리 삶도 하나의 게스트하우스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고 가는 중에 누군가는 하루 만에 떠나가기도 하고 그 중 몇몇은 조금 더 오래 머물기도 한다. 터미널과는 다르다. 터미널을 찾는 사람들은 무조건 떠나는 사람들이지만, 게스트하우스는 장기 투숙자도 있으니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내가 묵었던 도시들의 다양한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



이 곳이 아니라면 어디든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여행을 일상처럼 하는 건 현실적인 제약으로 어려울 지 모르나, 여행자의 마인드로 일상을 살아보기로 했다. 똑같아 보이는 하루하루 속 소소한 새로움을 발견하면서. 여행이 갖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빡빡한 일상으로부터의 휴식,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 익숙함으로부터의 도피, 또는 그냥 갈 수 있으니까... 나에게 여행은 '이 곳이 아니라면 어디든'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어딘가를 꼭 가고싶었다기 보다는, 지금 이곳에서 떠나고 싶어 선택한 여행인 경우가 많았달까. 그야말로 방황을 위한 방황으로써의 여행. 


Not all those who wander are lost

방황도 체질이라 한다. 내 방황의 역사를 아는 지인들은 너처럼 십대부터 쭈욱 일관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도 드물다며, 이제 좀 정착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나의 이런 성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문구를, 반 쯤 읽다가 내던지고 아직 줍지 않은 책 <파우스트>에서 찾아내고야 말았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는 괴테의 말. 삶에 있어서의 방황은 생의 다채로움과 참된 자아를 찾는 지름길이라는 말에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나는 노력하고 있으니까 방황하는 거라고. 언제 정착하고 싶어질 지는 모르지만, 그 때까진 실컷 방황하고 방랑해 보자고.


떠나야 해. 뭔가 있어.


그리하여 한 주 뒤면 나는 또 다시 짐을 싸서 떠난다. 그곳엔 또 어떤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