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지만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로 기억되는 아메리칸 사이코의 원작자가 근래에 낸 소설, The Shards. 한국에는 한국어판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스웨덴에서는 한국어판 책을 구할 수 없기에 영문판으로 구입을 해서 읽었다.
사실 아메리칸 사이코라는 영화는 알고 있었지만, 이 작가 Bret Easton Ellis를 알고 있진 않았다. 그러다 운동할 때 즐겨 듣던 스웨덴 라디오 채널에서 이 작가가 전화 인터뷰를 하는 걸 듣고는,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인터뷰에서, 이제는 파티도 싫증이 난 상태고 사교모임에 나가서 새로운 사람들과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일에 필요성도 상실했다고 말했다. 그런 표면적인 대화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다수를 이루고,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뭐 하고, 겉치레나 소개가 대부분이 대화를 하면 뭐 할까? 그렇기에 그런 사교활동에 어떠한 즐거움이나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다고 했다. 인생을 살만큼 살아보았고, 경험할 것도 어느 정도 다 누려보았기에 인생의 후반기에는 그저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지만 그 속에서 단조로운 평화를 추구한다고 작가는 전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생의 허무함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주 하이톤으로 '이것저것 다 해봤고, 이젠 그딴 것 다 필요 없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집에서 글만 쓰고 따분한 생활을 한다고 했다.
그 모습이 딱 나였다. 요즘은 친구를 만나도 집에 빨리 들어가고픈 마음메 굴뚝 같이 생기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과 많나 온갖 신경이 곤두세워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떤 이익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도 지루한 일상의 반복을 즐기고 있다. 뭔가 흥미로움을 잃어버렸지만 이렇게 반복되는 평화로운 반복적 일상이 좋아졌다. 인생 뭐 있는가? 무탈하게 잘 지내면 좋은 거지. 작가의 인터뷰를 듣고, '이거 딱 나잖아?'라는 반가운 마음도 들었고, 역시 내가 크게 될 작가의 기질을 타고났다는 점에서 그와의 동질성을 느꼈다. 다만, 나는 매일 글을 쓰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게으른 작가가 맞이하게 될 실패의 길을 걷고 있는 작가인 게 아닌가 싶다.
The shards는 굉장히 두꺼운 책이다. 거기다 영문판이다. 그런데 몇 장 읽어 내려가자마자 손에서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록 엄청난 가독력이 있는 책이다. 일 때문에 혹은 밥을 먹어야 할 때 잠시 책을 덮으면, 여가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다. 이것 끝내고 다시 책을 펼치는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로 매력적이다. 책의 문학성은 높진 않다. 전형적인 흥미용 책이지만, 그렇다고 쓰레기 같은 책은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잃어버린 젊은 시절의 두근거림을 일깨워주는 노스탤지어 같은 책이기도 하다. 영어도 상대적으로 쉬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진 않다. 만약 영어로 일상의 대화 정도가 가능하다면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쉽다. 물론 모르는 단어가 몇 개 있지만, 전체 맥락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쉬운 언어는 튼튼한 스토리텔링에 적합했다. 이야기를 하는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전체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이야? 하면서 한 스텝이 꼬이면 후에 나오는 스텝들이 점점 꼬여 들어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아주 쉬운 문장을 사용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긴장감 높은 이야기를 농밀감 높은 성적 긴장감과 섞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누가 살인범인지 감이 오는 바람에 마지막 부분에서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야기를 서술하는 그의 재능에 놀라고 말았다. '아, 이렇게 베스트셀러가 탄생하는구나!'를 느꼈다. 그리고 잘 팔리는 매력적인 책의 요소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을 잡게 해주는 책이었다. 머지않아 넷플릭스로 시리즈가 나오던 영화로 제작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요즘은 책이던 영화던, TV 시리즈던 풍성한 이야기가 잃어버린 작품들이 많다. 이야기는 없고 스타일만 있는 난무 한다. 잘 짜인 이야기가 풍성한 오락용 책, 그게 바로 The Shards였다. 샤드라는 단어가 가진 '유리 조각'이라는 뜻대로, 위험할 수도 있는 유리의 조각들이 이야기 전개의 군데군데 펼쳐지고 그것이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전체 이야기를 잇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들이 된다.
이 책은 작가의 십 대 시절인 1980-81년 로스앤젤로스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끌어가는 시점자이기도 하다. 작가 이름이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실제 그의 여자 친구나 주변 친구들도 실제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가 살았던 배경은 사실이나, 이야기의 구성이나 발전은 사실이 아니 허구다. 즉,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기 상상력으로 재창조한 책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구성해 나가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허구의 이야기이임을 말면서도 작가 자신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기에 마치 진짜인 것 같은 착각을 주는 요인도 있다.
근래에 읽은 책 중에서 글쓰기의 모범으로 삼고 싶을 정도인 책이었다. 혹 이야기 구성에 관심이 있는 작가라면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오락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