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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 살고 있기에 집에 딸린 정원은 없다. 그래서 텃밭을 몇 년 전에 분양받았다. 그곳은 타운에서 철도길 옆 공공부지를 텃밭으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분양해 준 곳이다. 기차가 시도 때도 없이 지나가기에 쓸모를 찾기가 힘들다. 그 공간을 텃밭이나 정원을 가꾸고자 하는 시민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다. 스웨덴에서 이를 '콜로니'라고 부른다. 20명 남짓한 회원이 조합을 이뤄서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주로 은퇴한 할머니들이 회원이다. 스웨덴에선 나이가 들면 관리가 쉬운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데, 아파트엔 텃밭이나 정원이 없으니 이렇게 콜로니에서 자신만의 녹색 공간을 가지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 콜로니 회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래서 처음엔 다들 걱정 어린 눈으로 '뭐 저런 어린 노무 새끼가 제대로 관리나 하겠어?'라는 눈총을 받아야 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날, 80이 넘은 콜로니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네, 정원을 가지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나와서 잡초도 뽑고 잔디도 깎아야 하는 거 너 알제?"
중년에 불과한 어린아이들에게 경고 같은 당부를 하신 셈이다.
그리곤 계약이 성사된 기념으로 전주인은 집안 장롱에 보관해 둔 오래된 술을 꺼내서 우리를 대접했다.
그들의 걱정과는 반대로 우리는 콜로니에서 쉬지 않고 일하는 회원으로 알려졌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여가를 즐기기 위해 꽃이나 가꾸며 커피나 한잔 하며 여름날씨나 즐기기 위해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목적은 달랐다. 정말 먹을 채소를 기르기 위해 정원보다는 텃밭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전주인이 가꾸던 화초의 절반을 없애고, 그 자리에 호박, 감자, 당근, 배추, 콩, 옥수수, 깻잎 등을 심었다.
열심히 일하는 우리들을 보고 난 후에야 콜로니조합은 우리를 정식회원으로 대우해 주기 시작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시작한 순간, 할머니들은 우리에게 이것저것 부탁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 멕시코에서 온 양반(할머니는 한국인과 멕시코인을 늘 헷갈려하셨다)! 저 위에 있는 호스 좀 내려다 줘. 내가 허리가 아파서 거기까지 손이 안 닿아."
"큰 화분이 너무 무거워. 좀 다른 곳으로 옮기는데 도와줘."
"나는 제초기가 없어. 너네 잔디 깎을 때 우리 정원도 좀 깎아줘."
이렇게 나는 '어떻게 이민자가 값싼 노동력으로 탈취당하는가'를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은지, 할머니들은 노동력을 빌린 대가로 딸기, 토마토, 라즈베리, 사과를 한 아름 건네주었다.
이렇게 '뭐든지 부탁하면 잘 들어주는 젊은이' 혹은 '콜로니 공식 머슴'으로 우리는 평화로운 여름날들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스웨덴의 서리범이 우리 콜로니를 방문한 것이다. 어느 날 찾은 텃밭에는 입구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을 잠글 때마다 2-3번은 기본으로 확인하는 습관이 있는 OCD라 문을 그냥 열어 두고 왔을 리가 만무했다. 이상한 생각에 들어간 정원에는 이곳저곳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정원에 딸린 작은 오두막의 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작은 열쇠를 채워놨는데 그걸 바위로 부숴버리고 침입한 것이다.
오두막 안에는 값이 나가는 게 있을 리 만무하다. 농사기구나 컵, 그릇이 전부다. 서리범도 헛수고를 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꼼꼼하게도 다른 정원의 오두막들도 하나같이 이렇게 당했다.
사라진 것은 그저 채소들이었다. 누군가는 사과를 도둑맞았고, 땅을 파헤치고 감자를 훔쳐간 곳도 있었다. 우리는 주로 당근을 서리당했다. 그것도 뽑아서 이쁘게 자란 것들만 가져가고 못난이들은 대충 다시 쑤셔 박아 놓았다. 황당한 놈들이었다.
그나마 우리는 운이 좋았다. 옆정원 할머니는 아침에 정원에 와서 오두막을 열어보니, 한 홈리스가 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너 여기서 뭐 하냐?"라고 묻자, "아니... 지난밤에 기차를 놓쳐서요."라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단다. 그 옆 할머니는 더한 일을 당했다. 누군가 양동이에 변까지 싸질러 놓고 갔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는 "뭔 사람노무 새끼가 똥을 이리 많이 싸냐?"라며 그 양에 또 놀랐다고 했다.
물론 금전적으로 크게 손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매해 3-7번은 일어난다. 정성 들여 가꾸어 놓은 채소들이 뽑혀 나간 구멍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다. 간밤에 우리 정원을 찾아오신 놈들은 정원을 이곳저곳 쑤시고 다니셨다. 호박덩굴이 끊어져 있었고, 옥수숫대 허리가 절반으로 꺾어져 있었으며, 콩줄기는 쓰러져 있었다. 그 와중에 한입 베어 먹은 사과는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열심히 시음하시고, 필요한 채소들은 챙겨들 가셨다.
올해는 부쩍 심하다. 경제가 안 좋아서인지 채소를 훔쳐가는 일이 잦아졌다. 누군가는 어린애들의 장난이라 그랬고, 누군가는 집시들의 소행이라고 했다. 다른 이는 분명 홈리스의 작태가 분명하다고도 했다. 어떤 할아버지는 어떤 이민자로 보이는 사람이 정원에서 서성이는 걸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우리는 대책을 세우기 위해 여러 번에 걸쳐 회의를 했다. 누군가는 CCTV를 달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콜로니에는 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2명의 회원은 누가 봐도 가짜로 보이는 싸구려 CCTV를 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서리범은 그것을 부셔 놓았다.) 누군가는 채소에 독을 타자, 함정을 만들자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독이 든 채소를 실수로 먹을 위험성도 이었다. 그리고 괜히 그들을 건드리면 더 심하게 보복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채소만 훔치던 자들이 이제는 오두막에 불을 지를 동기를 만들어선 안되었다. 그렇게 회의는 지지부진하게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끝이 나길 반복했다.
이런 일을 당하고 이상하게도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생각났다. 뭐든 소유하면 걱정이 딸려서 온다는 그의 말이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