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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부 Nov 20. 2020

야심한 밤에 남녀가

나는 티브이를 보던가 핸드폰을 뒤적이던가 책을 건성으로 읽으면서

발톱을 깎고 있던 남편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를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선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그런데  우리 집 주전자는 본분이 물을 끓이는 것인지 수증기를 만드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스위치가 꺼질 때까지 한참 동안 엄청난 수증기를 뿜어대곤 한다. 처음엔 무슨 이런 주전자가 다 있냐고 투덜댔지만 요사이는 수증기가 나올 때쯤이면 얼른 다가가서 얼굴을 들이민다. 건조한 얼굴에 수분 미스트를 뿜어주는 맛이 좋아서 요즘은 이 주제 모르는 주전자가 싫지 않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남편과 둘이 거실에서 기억에 남지 않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주전자가 끓는 소리를 내자 얼른 달려가서 수증기에 얼굴을 들이대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아들이 귀가했다. 왔니? 소리에 부엌으로 온 아들이 불도 안 켠 부엌 한편에서 주전자에 얼굴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 둘 다 너무 이상한 거를 하고 있어.." 한다. 엉? 나? "아빠는 뭐하는데?" 물었지만 이미 돌아선 아들은 못 듣고 가버린다. 들어보니 문도 안 닫은 거실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콸콸 난다. 남편이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문도 안 닫고 화장실 일을 본다는 게 웃겼다. 

야심한 밤에 남녀가 있는 집에 벌컥 들어가도 이 남녀들은 다정하게 앉아 과일 깎아먹으며 티브이를 본다거나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눈다거나 그도 아니라면 조금 무안할 정도로 에로틱하거나 하는 장면 대신에 대체 뭐하는지 모를 일을 각자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코믹하다. 엄마 아빠는 이제 남녀가 아닌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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