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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고 내일 온다. 내년이도 오고

생일빵인가?

by khori

빠꾸 없는 시간이 흘러가는 중이다. 익숙하기보다 자주 잊고 사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음력으로 계산하는 내 생일도 몇일인지 잘 모른다. 당연히 세상 타인들의 생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부작용이 있다. 그날이 특별할 수도 있고, 벌써 오래전에 흘러간 시간을 일정한 간격으로 기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결과는 자신이 걸어온 발걸음에 따라 존경받을 분인지, 특별한 색이 없는 그저 그런 사람인지, 금수만도 못한 놈들인지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세상에 흔한 사람은 없다. 스타워즈 트루퍼스처럼 다 똑같이 생겼지만 제각각인 캐릭터들이 상상 속에 존재하긴 하지만.


오늘도 조촐하게 밥을 먹자는 주인님에게 호텔 뷔페를 골라보랬더니 너무 비싸단다. 또 그 흔한 '나중에 가자'는 말을 한다. '우리 나이가 이젠 나중에 나중에 할 나이가 아니다'라고 했다. 발 없는 고기를 안 먹는 녀석 때문에 '달봉이 굶기고 일단 우리끼리 먹고 나중에 뭘 먹이면 안 되나?' 이런 고민이 들 정도로 뭘 고르기 힘들다. 2시간 정도 검색을 했더니 별봉이 녀석이 '여기 이탈리안 괜찮아 보여요'란다. 달봉이는 어차피 메뉴에서 가장 아랫것(비싼 녀석)을 고르는 취향이다. 주인님이 작당모의를 보며 잔소리를 하신다. 그러나 달봉이 별봉이를 시키니 참 편하네. 이게 민주주의 다수결이지. 아무렴. 오후엔 읍내에 또 나가야 하네.


어제는 몇일인지도 모르는 나에게 사무실 막둥이가 레고 선물을 준다. 지난번에 친구랑 놀러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생일이란다. 지갑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돈을 다 쥐어주고 재미있게 보내라고 했다. 나도 언제인지 모르는데 내 개인정보를 저장해 두었다니. "레고 좋아하시잖아요"라는 상쾌한 말투에 "이젠 그럴 나이가 아니지. 뵈는 게 없다니까"라고 답을 했다. 혼자 생각해 보니 키덜트도 아닌 나이가 되어가는데. 또 다른 생각은 레고 가격을 생각하니 괜히 더 부담스럽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잘 만들어 놓으란다. 주변에선 나만 보면 뭘 자꾸 시키냐고! 옳지 않아 옳지 않아.


예전 크리스마스 장식용 소품을 레고로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선물상자, 크리스마스 트리, 그러다 몬드리안 그림도 만들어봤는데 시간이 넉넉하고 손가락이 잘 돌아갈지 모르겠다. 촛불을 보니 레고도 프라모델처럼 점점 표현을 살리기 위해 기존의 투박함을 포기하는 것 같아 보인다. 집에 찾아보니 예전에 만들어 둔 레고 트리 장식이 있다. 같이 잘 만들어서 사무실 한 켠에 놔야겠다. 이젠 산타 할배도 쌩까는 처지지만 어쩌겠어. 2025는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잘 가라 다시 돌아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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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즈로 주는 다이어리를 받으려고 책을 주문했다. 작년엔 유럽 출장 갔을 때 paperbank의 사치스러운 다이어리를 샀는데 올해는 기회가 안 된다. 과거에 쓰던 서점 다이어리를 써야지 뭐. 매번 파란색, 빨간색 일색이었는데 올해는 오렌지 색이 맘에 든다.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는 집에 양장본을 후배 딸내미가 와서 줘버렸다. 다시 한 권 샀다. 책이 목침 수준이네. 다이어리 사고, 내년에 하고자 하는 계획을 기록했다. 올해 다이어리에 남아 있는 계획과 현실을 돌아보기도 한다. 매년 큰 차이가 없지만 거창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욕심과 바람을 담는 정도다. 이 정도면 2026년 준비는 대강 철저히 한 셈이다. 매년 모여서 축하하고, 한풀이한다고 술 마시고 시끄러워봐야 변하는 게 있나. 그래도 이런 걸 안 하면 또 심심하긴 하지.


11월 들어서는 깊고 파란 하늘 대신 세상의 색온도가 영 우중충하다. 나만 그런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는 사무실에서 해 질 녘 붉은 노을을 볼 수 있다. 마지막까지 빛을 뽐내면 저편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선명하다. 멋지기도 하고, 재도 이제 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 온몸을 불 싸르며 넘어가고 있으니.


그런가 하면 일은 요란한 세상 풍파로 요란하게 굴러가는 중이다. 시장 개척하고 본사로 이관한 사업들은 입찰 최종 라운드가 진행 중이고, 견본까지 보내고 푸닥거리를 했던 고객은 1월에 방문을 한다고 한다. 누가 들어도 알만한 기업이라 잘 되었으면 한다. 이젠 현장을 다 후비고 다니던 때가 아니라 길을 열고, 젊은 주력들이 그걸 받아서 거듭나게 하면 그만이다.


훼장님은 나를 음흉하게 욕심이 많은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고 자주 말한다. 어쩌면 욕심이 더 어마어마할지 모르겠다. 업이 기가 막히게 되는 것이 우선이다. 반면 눈앞에 작은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내 입보다는 타인의 입에 먼저 넣어주려고 노력할 때가 많다. 종종 매달린 자들이 성가시고 귀찮았다는 것을 지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 당시는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이런 점은 스스로 아둔할지도 모르겠다. 천상 잡부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배은망덕과 예의염치가 없는 것들은 내 인생의 여집합이다. 종종 자기 해석대로 떠드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으며,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생의 흐름을 말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차피 지맘대로인걸. 하던 대로 하는 것은 앎의 수준, 욕망의 수준을 모두 포괄해서 나의 수준으로 수렴된다. 세상은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을 해석할 뿐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정확하게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고, 스스로에게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내가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그 보여짐과 내면의 차이를 어떤 인생 원칙을 갖고 조율해 나갈 것인가는 자신의 인생 스토리가 될 뿐이다.


살아오며 사람을 만난다. 그러다 '이 종자는 전혀 다른 종자인데'라며 깜짝 놀란 적이 몇 번 있다. 세상의 많은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공항에서 마주치는 연예인들도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삶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중에 머리 돌아가는 RPM이 전혀 다른 수준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분야가 다르고, 충분히 가능한 범위에서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하늘 위에 하늘같이 소리 없이 엄청난 RPM으로 말로 나오는 처리결과를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일단 정신 바짝 차리고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듣고 보는 것이 우선이다. 잔머리를 굴리면, 내 생각은 계산처리가 완료되고 그 이후까지 감안해서 더 난해한 결과가 나온다. 이런 사람 뚜껑을 열면 경을 치는 익스프레스를 타는 거지. 요즘 ChatGPT가 왜 그렇게 열광인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만나 업체 임원은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좌중을 압도하는 지식과 경험을(내가 그렇다는 말은 전혀 아님) 이야기하다 갑자기 개인적인 이야기로 급선회한다. 특이한 일은 호기심과 호감이 생긴다는 점이다. 저 양반도 오타쿠인가? 짐작의 선이 머릿속에서 저 너머로 간다. 어떤 선을 기준으로 하나는 목표를 향한 고난의 행군이고, 하나는 저 높은 곳을 향한 고난의 행군이 생길지도 모른다. 본인은 혹시 온갖 걱정을 끌어 안고 있지 않을까? 원래 높은 자리가 겉으로 보기 좋고, 해보면 3D 업무라 어쩔 수 없다.


산업의 수직계열화 구조 때문에 그 임원이 있는 회사는 우리의 고객이 될 수 있고, 그 회사의 고객은 우리 두 회사의 상전이 되고, 최종적으로 소비자들이 눈으로 보는 기업은 최상위 의사결정 기업이 된다. 말이 좋아 수직 계열화이지 쉽게 이야기하면 황제-왕-봉건제후라고 부르고 나는 미천한 양민이라고 보면 된다. 역사를 많이 공부해 보면 기술문명은 발전 변화해도 인간은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거기서 거기다. 역사는 이간 통계의 대표적 표본이다.


지피지기처럼 자기가 처한 분수를 알아야 하고. 그것이 불만은 아니다. 그렇게 산업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황제, 왕, 봉건제후로 해당 기업 종사자들과 이야기하면 웃어넘기는 일이 다반사다. 이심전심이니까. 봉건제후도 왕이나 황제가 지시하면 우리가 무슨 힘이 있냐고 넋두리를 한다. 해외 고객도 지난번 미팅에서 하소연을 똑같이 한다. 힘없는 나만 족쳐댄다고 해서 나 같은 미천한 양민은 어떻게 하냐고 되려 퉁을 주기도 했다. 외국의 왕도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거지.


봉건제후가 어떻게 정보 전달을 했는지, 왕을 알현할 기회가 생겼다. 이것저것 물어보길래 되려 봉건제후가 보고를 하지 않았냐고 물어봤더니 웃으면서 다 봤다고 한다. 양민이 뭐 있어! 한 번 미천한 우리 집에 와볼 생각이 없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당장 가겠다고 해서 요즘 푸닥거리 중이다. 본사도 출장 일정을 조정해서 준비 중이고.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봉건제후에게 요약전달을 했더니 축하한다고 한다.


생일이라 그런가 어제는 우리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논의하는 기업과 연관된 사업이 수주된 것 같다며 신이 나서 메일을 전달해 준다. 담당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물어보는데 한국이름을 보면 99.99% 남자라고 회신했다. 메일을 자세히 보니 음.. 이건 왕이 아니라 황제인데?? 뭐 이런 경우가. 왕족 담당에게 전화해서 상황 전달을 하고, 최상위 기업에겐 친절하게 메일도 보냈다. 이런 게 체질에 잘 안 맞는데, 산업구조상 불가피하니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안 그래?


업무정리를 하고 돌아보면 '이거 생일빵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봉건제후를 만나서 뭘 진행해도 1-2년은 걸리고, 왕의 윤허를 받는 것과 실제로 시작하는 일은 또 1-2년이 걸린다. 결과가 나오기 기다리다 황천인지 극락 가기 쉽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뭔 일이 이렇게 후다닥후다닥 되는 거지?


급하게 하는 일이 기회기도 하고, 마가 끼는 것이 아니라 준비가 부족해 끝없는 개고생 계단을 헤매는 이유가 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오래 동안 해 오던 분야와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고, 작게 보면 새로운 분야의 도전 중이다. 희한하게 이 분야를 하면서 알 수 없는 이유와 상황으로 너무 쉽게 business cooking lead time이 짧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뭐가 이렇게 쉽게 되냐?'라는 생각과 저 편으로 넘어가는 태양처럼 바짝 나를 태워, 등신불인지 등신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제 슬슬 어려운 건 이젠 젊은애들을 불가마에 넣어서 도자기를 만드는 방식으로 바꿔봐야 하나? 그럼 또 누가 날 족치겠지.. 이걸 어쩐다.. 어쨌든 일단 모든 일에 감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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