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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진 Feb 03. 2024

한국과 정말 다른 독일 1등 지상파 뉴스, 비결은?

ARD 타게스샤우 앵커 유디스 라커스. 지난 주 사직하고 유기농 식재료 농장 사장님으로 전향하셨다. 출처: ARD



독일에는 ‘독일인의 밤 시간은 타게스샤우(tagesschau) 뉴스 시간인 밤 8시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희 집도 그렇습니다. 저녁 8시가 되면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타게스샤우를 시청합니다. 1952년부터 70년 가까이 저녁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시작하는 '독일 TV 뉴스 1등'이 바로 타게스샤우입니다.



타게스샤우 평균 시청자수. 출처: 스태티스타



타게스샤우는 Tag, 즉 날, day라는 뜻의 복수형인 Tage와 Schau '쇼, 전시회, 열람회'의 합성어입니다. 영어로 치면 ‘데일리쇼’ 정도가 되겠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뉴스쇼' 정도로 풀어 해석하면 의미가 맞을 것 같습니다.


스태티스타 자료를 보면 2022년 기준 평균 시청자수가 1천만 명이 넘는데요. 전체 8천4백만 인구의 12% 수준이고, 모집단을 TV 보유 가구수에서 계산하면 시청 점유율이 40% 수준입니다.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신뢰도 역시 높은데요. 설문조사를 돌려보면 제1공영방송 ARD의 타게스샤우가 부동의 1위, 제2공영방송 ZDF의 호이테가 2위를 놓치지 않습니다.


과연 타게스샤우는 무슨 매력이 있는 걸까요? 한국 방송 뉴스와 비교해보면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15분 팩트 폭격


저는 처음에 타게스샤우가 ARD의 메인뉴스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고작 뉴스 러닝타임이 15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평균적으로 리포트가 1분 30초, 단신이 30초에서 길면 1분 길이입니다. 리포트와 단신, 특파원 연결 꼭지 1분 30분 정도를 편성했을 때 통상 10~12개 꼭지를 다룰 수 있습니다. 45분 동안 20~30개 꼭지를 쏟아내는 국내 지상파 메인 방송과 가장 다른 점입니다. YTN과 연합뉴스TV의 메인 뉴스는 밤 10시인데요. 중간 광고 포함해 1시간 45분 짜리로 편성됩니다. 여기에 비하면 타게스샤우는 길이가 퍽 짧습니다.



ARD 간판 앵커 수산느 다우너 누님. 출처: ARD



시간적 제약 때문에 8시 타게스샤우는 선택과 집중이 긴요합니다. 그날의 핵심 뉴스를 최대한 집약적으로, 핵심만 전달합니다. 오만 주요 뉴스를 다 다루려고 하기 보다는 버리고 추려내어 그날 독일 시민들이 무조건 봐야 할 가장 중요한 뉴스만 전달하는 게 포인트인데요.


ARD 전 의장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뉴스기사 주제를 시청자들의 관심이 아니라 저널리스트의 관점에서 취사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국민이 보고 싶어하는 뉴스를 보도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꼭 봐야할 중요한 소식을 전한다는 거죠. 이게 경영진의 뉴스 선정 원칙인 것이죠. 참고로 ARD는 사장이 없습니다. 대신 방송위원회의 의장이 대표 역할을 5년 임기로 맡습니다.



2020년 11월 기준 독일 메인 방송 뉴스의 뉴스 주제 범위. 어느 방송이든 정치 꼭지가 압도적이다. 출처: 스태티스



한국 언론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런 식으로 뉴스를 분류합니다. 그런데 타게스샤우는 ‘국내, 국제, 경제, 지식’의 범주로 뉴스를 분류합니다. 국내외 정치 뉴스가 70%에 가깝습니다. 나머지는 국민 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과 경제 상황, 철도 노조 파업 등 역시 국민 생활에 직결되는 시민사회 소식으로 구성됩니다.


아무리 핵심만 전달한다 하더라도 조금 더 심층적으로 따져봐야 할 뉴스들은 그냥 넘어가기엔 좀 아쉬운데요. 그래서 ARD의 메인 뉴스는 이원화 돼 있습니다. 저녁 8시에는 15분 간 핵심 뉴스를, 밤 10시 15분에는 몇 가지 주요 주제를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시사 매거진 뉴스를 방송합니다. 제목은 Tagesthemen(타게스테멘) 즉 ‘그날의 주제, 테마’란 뜻입니다. 30분 동안 생방송 보도합니다. 뉴스 꼭지로 놓고 보면 타게스테멘은 적게는 5꼭지에서 최대 10꼭지까지 조금 더 유연한 편입니다.


권력 비판과 감시에 진심인 편


독일 제1공영방송의 뉴스는 거의 경성뉴스 중심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정부의 발표 등을 거의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인 건 아닐까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부 발표에 비판의 소지가 있다면 이게 어떤 점에서 비판 받을 수 있는지 기자가 분명히 짚습니다.


타게스샤우나 타게스테멘에서 각료들과 앵커가 격렬하게 토론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합니다. 중요한 정책은 장관들이 직접 출연해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약속 대련은 없습니다. 앵커가 예민한 질문을 던지면 출연한 장관이 발끈해 반박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아네다워 초대 총리가 ARD의 타게샤우가 너무 정권 비판적이다 보니,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제2공영방송 ZDF 설립을 허가했다는 건 독일 방송계에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분위기 좋을 땐 그저 좋은 타게스테멘. 출처: ARD



타게스테멘은 앵커의 주관적인 뉘앙스를 담아 자유롭게 표현하는 앵커멘트, 몸짓 언어가 모두 가능합니다. 8시 타게스샤우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앵커는 2명이 나옵니다. 한 명은 대담을, 한 명은 타게스테멘의 그 날 주제와 관련된 리포트 꼭지 등을 소화합니다. 시간이 짧은 타게스샤우에서는 정말 중대한 건에 한 해 주요 인사 인터뷰를 하고, 어지간하면 각료급 혹은 전문가 인터뷰는 타게스테멘으로 돌립니다. 해설 위원의 해설 꼭지도 하나 이상 들어갑니다.


정권이 공영방송에 손 대기 어려운 구조


이런 보도 스탠스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재원과 조직 구조 때문입니다. ARD를 비롯한 제1, 제2공영방송은 물론 각 지역 거점 방송국 재원은 수신료로 충당합니다. 한 해 12조 2천 5백억 원이 걷힙니다. 저녁 6~8시에는 광고를 받아 추가 재원을 마련합니다. 연방정부가 여기에 손을 댈 수 있는 통로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정부가 한국언론재단을 통해 언론들에 떡고물처럼 나눠주는 정부 광고도 없습니다.


국회의 의결을 거쳐야만 수신료 등 재원에 손을 댈 수 있는데요. 전쟁 이후 표현의 자유가 독재를 막고,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정치권과 국민 모두가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지역 거점 방송국까지 모두 합친 수신료 액수. 85억 6천 7백만 유로. 출처: 스태티스타



방송국의 구조도 특이합니다. ARD는 실체가 없습니다. 방송국 건물이 없습니다. 자체 제작 뉴스도 없습니다. 서울 중앙에 대형 본사가 있고, 각 지역사에 서울과 전국권 뉴스를 내보다가 지방권으로 각각 뉴스 주도권을 넘기는 형식이 아닙니다. 지역 거점 방송국에서 제작한 리포트와 단신, 각 지역 거점 방송국에서 파견한 특파원들이 전하는 소식을 ARD로 모아서 전국에 뿌리는 구조입니다. ARD 앵커와 아나운서, 편집국 보도 요원들은 북독일 거점 방송인 NDR 함부르크 사옥으로 출근합니다. NDR 스튜디오를 빌려 쓰는 겁니다.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2차대전 이후 독일의 방송, 즉 나치의 괴벨스가 주관했던 독일의 모든 방송 조직은 해체됐습니다. 그리고 8곳의 연방별로 지역 거점 방송국이 설립됐습니다. 힘의 분산이죠. 모두 민영 방송이지만, 연합국의 전후 관리 체제 하에 각 방송국별 방송위원회(Rundfunkrat)가 법적 기구로 설치됐습니다. 30~100명의 각계 각층의 인사로 구성이 됩니다. 기업의 이사회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방송국이 독자적으로 독주할 수 없도록 구성한 것이지요.



지역 거점 방송 모두가 제1공영방송 ARD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마이크 덮개. 출처: WELT



ARD 사장은 없고, ARD 방송위원회 위원장이 대표 역할을 맡습니다. 이를 5년에 한 번씩 각 지역 거점사 대표들이 돌아가면서 역임합니다. 덕분에 방송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저널리즘적으로 할 말은 하는, 그런 뉴스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겁니다.


한국은 KBS의 사장 후보를 이사회가 천거하면 대통령이 재가합니다. 일반 시청자 분들은 한국의 공영방송 사장을 대통령이 최종 컨펌해준다는 사실을 잘 모르시더라고요. '공민영' MBC는 방문진 이사회가 최종 선정하는데, 이사회 구성과 이사장이 정권에 따라 바뀝니다. 전두환 씨의 5공 때 방송통폐합 이후 한국 공영방송은 언론으로선 상당히 꼬여버린 역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때 고착화된 구조가 현행으로 이어집니다.


재원과 조직이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언론이 언론으로서 제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사가 만사'입니다. 정권이 바뀌면 방송국 사장이 바뀌고, 방송국 사장이 바뀌면 보도국장, 편집국장, 전략기획국장, 각 부장급 인사가 밀물과 썰물처럼 나버리는 게 한국의 공영방송 현실입니다.



1952년 12월 26일 타게스샤우 첫 방송. 출처: WDR



독일 공영방송과 이렇게 비교해보면 모종의 시사점이 보입니다. 독일이라고 다 청렴하고 그런 거 없습니다. '나치'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나라입니다. 지금도 극우주의자들의 집합인 AfD가 호시탐탐 민주주의를 위협합니다. 그나마 전쟁에서 패배한 후 연합국 주도 아래 '다 뜯어 고치는' 국가적 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구조가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한 건 돈과 조직이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어야만 언론이 언론답게, 방송 뉴스가 방송 뉴스로서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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