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피벗(pivot)하기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셨어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대단합니다'
아내와 함께 7살, 3살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독일로 이민을 갔다고 하면, 듣는 사람이 통상 보이는 반응이다. 화려하고 번듯해 보이는 뉴스 앵커직을 포기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독일로 가족 모두가 떠났다니. 일반적이지 않은 인생항로임에는 분명하다.
이민은 피벗 전략
이민은 우리 가족에게 피벗(pivot) 전략이었다. 벤처 업계에서 피벗이란 쉽게 말해 사업 방향을 확 틀어버리는 전략이다. 이커머스 컨설팅 사업으로 자문료를 받으려다가, 아예 이커머스 B2C 사업으로 수익 모델을 바꿔버리는 식이다. 피벗을 결행하기 전에는 중요한 과정이 선행된다. 미국 펜실베니아대 커틀리 교수, 보스턴대 오마호니 교수의 2020년 연구(Kirtley & O'Mahony, 2020)에 비춰보면 스타트업의 현재 사업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정보'가 생겼을 때, 이게 위기인지, 기회인지 먼저 분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새로운 정보가 사업에 위기 요인으로 판명되면 출구전략을 세워야 한다. 반면 새로운 정보가 기회 요인으로 파악되면 추가전략을 마련한다.
이민을 결행하기 2년~1년 반 전까지 우리 부부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꽤 많이 축적돼 있었다. 그 새로운 정보란 이런 것이었다.
1. 나의 건강이 매우 악화됐고, 성격은 매우 거칠게 변했다.
2. 아빠와 아이들이, 남편과 아내가 일상을 함께하지 못한다.
3. 기존 4대 매체, TV 방송 사업은 사양산업이다.
4. 프리랜서 앵커는 정규직이 될 수 없다.
5. 한국 언론사는 정권이 바뀌면 실권자가 모두 바뀌어 사내외 제도의 영속성이 없다.
6. 언론사는 성과를 측정하는 게 불가능하고 보상체계가 주먹구구 식이다.
7. 정년까지 꽉 채우고 은퇴하는 선배들이 적다. (40대 후반, 50대 초반에 거의 대부분 퇴사)
8. 나는 한국에 있는 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엄두가 안 난다.
9. 한국에서 아이를 키울 때 굉장히 큰 비용이 든다.
10. 우리 부부의 교육관과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전혀 안 맞지 않다.
1~8까지는 모두 나에 관한 정보다. 9와 10은 자녀 교육과 관련 있다. 1부터 10까지 모든 정보가 다 '위기 요인'이다. 출구전략이 자명하게 필요했다. 정답은 이민이었다.
피벗의 결과는 다행히 성공적
4년 반이 지난 2024년 4월 현 시점에서 돌아보면 독일 이민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다. 우리 가족은 독일 북부 함부르크에 안착했다. 아이들은 어느덧 한국어보다 독일어로 말하는 게 익숙해졌고, 좋은 선생님을 만났으며 구김살 없는 친구들을 두루 사귀었다. 독일어, 한국어, 영어까지 3개국어가 편해졌다.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나 러시아어 등 4~5개국어를 구사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다국어를 구사하게 될 우리 아이들은 각 나라의 역사와 사상, 문화와 예술을 그 나라 언어로 접하며 견문을 넓혀나갈 것이다.
아내와 나는 느슨해졌던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가 함께 꿈꾸는 새로운 목표를 조금씩 구체적으로 그리는 중이다. 나 스스로 기존 사고의 틀을 깨부수고 더 나은 성품을 기르고자 부단히 애쓰고 있다. 독일에서 내가 접하는 새로운 정보들은 대부분 기회 요인들이다. 이 기회를 잘 살리기 위한 추가전략을 아내와 개발 중이다.
인생에서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면 내 삶에 쌓여 있는 새로운 정보들을 명확히 분류해보길 제안한다. 중요한 결정을 하긴 했는데 결단도 못 내리고 결행도 하지 못한 사람에게 이 분류 과정은 도움을 줄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뭉뚱그려 연상하지 않고, 하나하나 문장 단위로 쪼개어 직시할 때 시야가 또렷해진다. 안개처럼 뿌옇기만 한 막연한 두려움이 걷힌다. 정리해본 결과, 기회 요인이 많다면 어떤 추가전략을 쓸지 조사하면 된다. 위기 요인으로 가득하다면 출구전략을 써 피벗해야 한다.
출구전략이든 추가전략이든 이를 결단할 논리적 이유가 쌓이면 결행은 비교적 수월하다. 용기는 바로 이 토대 위에서 싹을 틔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