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4
같은 회사에 다니던 안모 선배의 상가에 다녀왔다. 2년쯤 전인가 암에 걸린 것을 알고, 투병을 하느라 회사를 쉬고 있던 이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병문안도 제대로 못 가 마음 한 구석이 편하지 않았는데, 최근 건강이 많이 좋아져 회사로 다시 나올 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고 반가워 했던 터였다. 그런데 불과 며칠 사이에 갑자기 패혈증이 발병해 중환자실에 갔다가 단 이틀 만에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선배는 대학교2학년인 딸과 중3인 아들을 남겨뒀다. 중3인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축구 클럽에서 두어번 그와 마주친 적이 있다. 압구정동에서 먼 송파강동까지 아이가 좋아하는 축구를 시키기 위해 다녔던 아빠다. 그 사이에 대치동에 들러 지금은 대학에 간 큰 아이를 떨궈 놓고 다시 픽업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하루하루 채워 나가고 있는 이 하루하루에 의미는 있는가. 매일매일 만들어지는 신문과 방송 뉴스와 매순간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인터넷 속보들을 통해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는가.
나는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일들로 만들어지는 세상과 나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매 순간 느끼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어느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는 삶의 무의미함은 일종의 초기 조건이다. 매순간 그 허무함과 대결하면서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회사에 다니고 주말이면 대학원 공부를 하고, 강연 요청과 원고 요청을 소화하면서 잠시도 쉴 틈 없는 날들이 이어진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도 등록한 학원 개수가 늘면서 비슷한 모습이다. 아내도 아이들 육아를 위해 15년 동안 접어뒀던 박사논문을 다시 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덕분에 주말에도 우리 가족들은 다 할 일이 있다. 열살짜리 막내만 혼자서 빈둥거리거나, 다른 가족들에게 같이 놀자고 요구하거나, 놀이터로 친구들을 찾아다닐 뿐이다. 물론 그도 조만간 이 대열에 동참하리라고 본다.
우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 삶은 어느 순간 바로 끝나버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매순간 의미를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다. 최근 프랑스에선 연봉을 1억이나 받는데도 회사에서 일을 제대로 주지 않아 너무 무료하다는 이유로 회사를 고소한 직원이 승소했다는 외신 보도를 보았다. 삶의 무의미성을 일깨워주는 회사에 대해 그 직원은 행동으로서 무의미함에 맞서 싸운 것이다.
'실행'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없다, 삶의 의미란 그 속에 있다.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의미를 찾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오늘 같은 날은 내 인생 책 중 하나인 이 책의 구절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