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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gle Rider Jun 18. 2020

분실물 신고센터에서

20200615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객차 안 맞은 편 좌석 아래 가방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은 마치 남의 물건인 듯 내버려두고 왕십리 어딘가에서 내렸다. "저기~" 하면서 가리켰지만, 그냥 본둥만둥 내려버렸다. 자기 가방이 아니라는 투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앉았다. 내가 내려야 하는 시청역까지 오는 동안 내내 신경이 쓰였다. 다른 사람이 앉아 있으니, 내가 굳이 그걸 꺼내 들고 내릴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시청역 직전 역인 을지로입구역에서 맞은 편 자리가 비었다. 가방만 남겨진채 좌석 아래에 웅크린 듯 놓여 있었다. 이윽고 시청역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고 내려야 할 순간, 무엇엔가 이끌린 듯 가방을 집어들고 내렸다. 뭔가에 이끌린 것이다. 일단, 출근이 급해서 들고 사무실로 갔다.

출근해서 챙겨야할 자질구레한 루틴 등을 마무리한 뒤 턱하니 책상 위에 남의 가방을 올려 놓았다. 화장품과 담배, 다른 사람들한텐서 받은 명함, 지갑, 친구들과 찍은 사진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다. 신분증과 신용카드가 담긴 지갑까지 있었으니, 꽤 소중한 가방이었을텐데 이걸 그냥 두고 내린 것이다. 십중팔구 게임이나 영화에 정신이 팔려 가방은 내버려둔 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내렸으리라. 가방의 주인공은 20대 중반의 남자였다. 잔뜩 쏟아져 나온 화장품이 모두 남성용이었다. 그런데 입술에 찍어 바르는 옅은 틴트에서 눈썹 부근에 바르는 아이브러쉬, 무려 세가지 종류의 콤팩트 파우더, 그리고 또 눈썹을 그리는 도구까지 있었다. 구불구불해진 머리를 눌러서 펼 수 있는 고데기까지 있었다. 그리고 발에 뿌리는 니베아 데오도란트까지... 아, 요즘 20대 남자들은 이렇게 화장을 하는구나..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회사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이 왜 그리도 자주 화장실에 가고,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수시로 손으로 확인하며 가지런히 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

자기 스스로를 소중하게 꾸민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누구보다 존중받고 근사하게 보여야할 사람은 자기자신이다. 우리 사회는 시선이 좀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징후다. 거리에 나와서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아마도 어느 순간부터 뚝 하고 끊길 것이다. 그러나 이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성향이 강해지는 세대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되는 것도 우려된다. 그래서일까, 아마도 우리 사회는 이미 대중문화로 대다수 국민들에게 만족을 주면서 엘리트 아니면 선동가들이 정치를 좌우하는 시대로 가고 있을 것이다. 계급적 계층적 정치적 대중의 각성은 사라지고, 한 명 한 명의 개체로서 자기 인식만 넘쳐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어쩌면 선동가들에게 매우 좋은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지하철에서 우연히 습득한 가방 때문에 별 생각을 다 했다. 점심 시간에 약속 장소로 가는 사이 잠시 시청역 지하철 역사에 들러 분실물 습득 신고를 하고 가방을 맡겼다. 그리고 6시간여가 지난 뒤 문자가 한 통 왔다.

'안녕하세요. 금일 아침 제 가방을 분실물 신고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셔서 제 가방을 무사히 찾을 수 있게 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문장 부호도 없는, 건조한 남성의 문체였다. 내가 별 써먹을 데도 없는 세상 걱정을 하고 있는 사이 실제 세상은 이렇게 시스템에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가 이리 요란스럽게 화장을 하다니' 이러면서 세태를 걱정했던 내가 무안했다. 선진국에서 태어난 지금의 20대를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난 40~50대의 시선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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