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ngle Rider Jun 20. 2020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20200620

새벽에 일찍 잠에서 깨었다. 새벽이라고는 하지만, 한여름으로 달려가고 있는 절기 탓에 날은 이미 훤히 밝은 시간. 더워진 날씨 때문에 열어놓고 잔 베란다 창문 틈 사이로 새들 지저귀는 소리와 집 앞 테니스장에서 괴성을 지르며 볼을 쳐대는 중년이훨씬 지난 남성들의 목소리가 나를 깨운 것이다. 평소 같으면 욕을 한 바가지 해줬겠지만, 오늘은 그리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쾌했다. 아직 6월 중순 가까운데 대낮부터 턱턱 막히는 더위를 느끼며 지쳤던 몸에 아침 공기가 무척 상쾌하게 느껴졌다. 주말이라 늦잠을 자도 되는데 눈이 반짝 떠진 바람에 살짝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 법도 한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옆에 누워 아직 잠들어 있는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른쪽 팔로 머리를 괴고 비스듬히 침대에 누운 채 왼 손으로 입술과 볼도 만져보았다. 아마도 침대에 눕기 전에 바른 화장품 때문인지 부드럽고 촉촉했다. - 건조한 느낌만 느껴지는 내 얼굴 피부와는 확실히 달랐다, 나도 요즘 눈에 띄게 얼굴 주름이 많아졌는데 뭔가 잠들 때마다 발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아내의 얼굴은 어제밤 잠들기 전보다는 살짝 부어 있었다. 아마 눈을 뜨자마자 거울을 보며 '어머나 또 부었어'하면서 한탄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이 빠진 얼굴보다는 부었더라도 탄력있는 아내의 얼굴이 더 좋다.

한쪽 팔로 팔을 괴고 누워서 잠에 빠진 아내의 얼굴을 허락도 없이 들여다보고 만지고 평가하던 이 순간이 순식간에 세월을 가로질러 까마득하게 먼 19년 전의 어느 날로 나를 소환했다. 연애할 때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약간 통통한 편이었다. 아마도 아내의 살짝 부은 얼굴이 그때 모습을 떠올리게 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혼식을 치르고 난 다음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속으로, '오, 신이여, 이게 정말 제게 일어난 일인가요, 이 여자가 지금, 제 옆 누워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이 여자가 정녕 제 아내라는 말입니까'

마음 속으로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내가 한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내심 뿌듯해하고 있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신비로웠고, 매 시간을 삶의 경이로움에 흥분해서 보냈던 것 같다. 이 세상에 태어나 전혀 모르는 사람인 채로 20년 넘게 지내온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던 것 같다. 그리고 십년 넘게 이어진 외로운 자취생 생활이 끝난 것도 반가웠다.

'신혼'이라는 말 답게 모든 것들이 새로웠을 것이다. 그 이후 벌어진 일들, 함께 서로가 익숙해지고, 몰랐던 성격이나 습관을 발견하면서 놀라고 실망하고, 고치려 하고 그러다 싸우고... 양가 부모님들을 두고 겪는 여러가지 심적인 일들로 서로 또 서운해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그 경이로움에 또 몇년을 살아가고 서로한테 약간 무심해지고, 둘째가 태어나고 다시 또다른 형태의 경이로움에 세월이 흐르고 우리가 늙어가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잠자리에서 깨어 혼자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날이 그 사이 몇번이나 있었을까. 오늘 우연히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때와 똑같은 자세 그대로 아내를 들여다보고 있던, 결혼 직후 살았던 영등포 첫 신혼집 풍경과 침대 , 하얀색 이불의 서걱거리던 느낌, 살짝 입을 벌린 아내의 모습을 보며 '아, 이렇게 자는구나' 하면서 혼자 우스워했던 기억까지 모조리 되살아났다. 기억이라는 것은 이렇게 십년 이상 없는 것처럼 저 깊숙한 곳에 있다가 이렇게 반짝 떠오른다. 많은 작가들이 유년 시절의 기억을 우물에서 길어올리는 것처럼 표현해온 것은 그러니까 꽤나 정확한 비유였던 것이다. 나 역시 오늘 아침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 최초의 기억을 떠올렸으니까.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서였을까 행복한 느낌이 꽤 오랜만에 들었다. 눈을 뜨면 머릿속으로 찾아와 나를 가득 채우던 근심걱정들, 해야할 일들 리스트나 아이들 공부 이런 것들 대신 오늘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낙관이 마음 속에 그득해졌다. 가끔은 이렇게 혼자 일어나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물론 잠든 아내가 좋은 것은 또 있다. 절대 잔소리를 안 하니까, 아마 오늘은 주말이라서 눈 뜨자마자 청소 이야기, 책 정리 뭐 이런 이야기부터 꺼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소리없이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하지만, 마음 속 행복감은 그대로이니, 꽤 괜찮은 하루의 시작이다.


작가의 이전글 분실물 신고센터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