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13 - 아줌마

아줌마. 리즈시절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인가.

by 홍마담
[질문] 도대체 어떤 남자가 제대로 된 남자일까요? 어떤 남자를 만나야 할까요?

물론 내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일부러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은 결코, 결단코 아니다. 단지 메인 화면에 떠 있는 수많은 글 중 출근길을 심심하지 않게 달래줄만한,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볍고, 단순하며, 복잡하지 않은, 제목에서 풍겨 나오는 적절함이 날 끌어당겼을 뿐이다.


[베스트 댓글] 17개월 예쁜 공주님과 뱃속에 왕자님까지 있는, 연애도 해볼 만큼 해보고 알 것 다 아는 30살 아줌마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조언해 봅니다. 저 역시도 아가씨 때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한테 데어 보고 뒤통수도 맞아보고 진짜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정말 여자라곤 저밖에 모르며 주말엔 무조건 가족들과 함께하고 일 끝나면 후딱후딱 집에 와서 저를 돕는 천사 같은 남편을 만나…(후략)


이 순간 나는 미묘하게 쪼그라드는 것 같은 심정이 된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해놓은 것이 많은 그녀에 비해 내 인생이 보잘것없고 형편없기 때문일까?


수십 개의 공감을 받은 저 유용한 현실적 조언 앞에서 아직 현실 파악도 못한, 갈 길이 먼 나 자신이 작아 보이기 때문일까?


아니, 그게 아니다.

사사로운 것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고 달관한 것만 같은 그녀가, 인생선배로서 경험에서 나온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는, 자신을 애 둘 낳은 ‘아줌마’라 말하는 그녀가 나보다 무려 두 살이나 적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줌마.


사십 대가 아닌, 삼십 대 후반도 아닌,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서른의 그녀가 자연스레 본인을 ‘아줌마’라 칭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세계가 붕괴되고 어떤 충격의 세계가 훅, 하고 내 얼굴에 잽을 날리며 들어왔다. 몰랐던 세계, 미지의 세계가 드러났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내게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닌가 생각해왔던, 아니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던 내게 ‘이 바보야! 넌 이미 그 세계에 진입해 있다고!’ 하며 강한 펀치를 내리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서른둘. 씁쓸하지만 나 역시 아줌마라는 호칭을 아예 들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가끔 공원에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있으면 어쩌다 한 번씩 꼬마 아이들이 다가와 ‘아줌마, 이 강아지 이름이 뭐예요?’라고 묻곤 했었으니까. 나는 ‘아, 언니 강아지?’하며 아주 태연하게 그 꼬마들의 실수를 은근히,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꼬집어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까지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그런 날이면 난 가슴을 진정시키고 평상시보다 오랜 시간 동안 거울 속 내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곤 했었다. 아줌마라니, 아줌마라면 적어도 누가 봐도 애가 있을 것 같다거나, 아니면 헤어스타일이고 옷차림이고 간에 꾸미지 않은 투박한 모습이 눈에 띈다거나 하는 특징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투박함, 보편적인 아줌마의 이미지와는 멀다고 자부해온 나였다. 유행을 좇는 타입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도시적이고 확고한 패션 스타일을 지녔고, 적어도 세 달에 한 번씩은 미용실에 갔으며 서른이 넘으면서는 피부와 몸매 관리에도 신경을 쓰고 있던 터였다.

어쨌든 내게 ‘아줌마’는 아직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고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당혹스러운 단어였다.


‘참나. 고작 서른인 주제에 왜 아줌마래. 듣는 서른둘 민망하게.’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 속 베스트 댓글의 서른 살 그녀. 그녀가 원망스러워졌다.




[니네 아줌마 소리 들어봤냐?]


오전 내내, 아니 아마도 하루 종일 내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우울한 생각을 해치워 버리기 위해서 나는 단톡 방에 톡을 날렸다. 이런 내 씁쓸함의 호소에 공감하고 위로해줄 이들은 서른둘 동갑내기의 그녀들, 나의 친구들뿐이지 않은가.


[그저께 지하철에서 어떤 아저씨가 내리면서 아줌마! 아 쫌 비켜요. 이러더라.]


K.


[난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나한테 아줌마 등기 왔어. 사인하고 가 이러는데?]


Y.


[나도 남사친들이 아줌마라고 부름]


W까지.


아무리 피부와 몸매 관리에 신경을 쓰고 동안이라고 우겨본들 생물학적 나이가 삼십 대인 이상 모두가 아줌마 호칭 공격을 피해가긴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아―, 우울하지 않냐. 아줌마 소리 들으면. 남편은커녕 남친도 없는데.]


두 번의 연이은 이별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던 K였다. 글쎄. 미혼의 솔로에게 아줌마라는 호칭은 오십 대인 우리 엄마가 할머니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커다란 세계의 붕괴가 아닐까. 그리고 그건 같은 처지인 내 얘기이기도 했다.

[난 결혼도 했고 어떻게 보면 아줌마 맞는데 아줌마 소리 들으면 사실 기분 좋진 않지. 자존심 상한달까. 뭔가 이제는 여자로서의 뭐 그런 게 없잖아.]


맞다. 그랬다. 유일한 유부녀 Y의 말처럼 아줌마는 유부녀를 가볍게 부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이리도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단지 나이가 들어 보인다거나 애가 있을 것 같다거나 겉모습이 투박해 보인다거나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여자의 자존심을 갉아먹는, 아주 민감한 영역의 문제였다.


아줌마라는 호칭에는 상대에 대한 그 어떤 성적, 인간적 호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억척스럽다거나, 뻔뻔하다거나, 굳세 보이기까지 하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속성을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듣는 이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어쩐지 한물간 것처럼 느끼게 하며, 중심부에서 밀려난 것만 같은 불안감을 불러내기까지 했다.


그런 이유에서 단순한 호칭일 수 있는 ‘아줌마’를 거부하는 건 결혼과 자녀의 유무를 떠나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그것은 영원할 것 같았던 왕성한 젊음의 시절이 차츰차츰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짚어 주었다.

현재 나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회사 내 가십걸에서 벗어나게 된 것, 헌팅의 후보에서 제외된 것, 소개팅 제의 역시 전과는 다르게 가뭄에 콩 나듯 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심장이 쿵, 쿵, 울렸다.


‘아줌마’라는 호칭은 리즈시절의 종말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은밀한 신호였 셈이었다.

애써 모른 척 그 사실을 부정하려 하는 내게 다시 한번 충격의 세계가 묵직하게 훅을 날렸다. 이제 전성기가 끝났음을 인정하라고.




[누나, 저 내일부터 상급반 가요 ㅋ]

누나라는 호칭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아줌마라는 씁쓸함의 구덩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나를 꺼내 준 건 중급반의 1번 주자, 파란 수모의 문자였다. 같은 중급반의 한 소속이던 파란 수모는 이제 중급반을 떠나 그 윗단계, 상급반으로 승급하게 되었음을 알려왔다.

[ㅇㅇ 그래 좋겠다]


약간의 질투가 섞여 들어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평영은 여전히 늘지 않았다. 물을 잡는 느낌도 들지 않았고 몸에는 자꾸 지나치게 불필요한 힘이 들어갔다. 킥을 찰 때 허리와 다리는 지나치게 힘이 실려 가라앉았고 충분한 호흡이 가능할 만큼 물 위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고전하는 나와는 다르게 같은 중급반이었던 95년생, 파란 수모의 그 아이는 이미 자유형, 배영, 평영을 지나 접영까지 진도가 모두 순조롭게 나간 후였다.

접영. 버터플라이. 그 몸짓의 아름다움을 잘 담아낸 이름이었다.

그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사람의 동작만으로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도 들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감상과는 전혀 다르게 현재 내 몸 상태로는 온전한 접영은 물론이고 접영 웨이브마저도 시도하기 힘겨운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강사에게 너무 뻣뻣하다며 이미 몇 번이나 지적받고 있던 터였다.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점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나이에 대한 의식을 하고 싶지 않아 신체적 변화는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삼십 대, 아줌마라는 단어가 또다시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고개를 젓다 느껴진 인기척에 문득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육아휴직을 마치고 두 달 전 복직한 P가 커피를 든 채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딱히 친밀한 사이는 아닌 데다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다 눈이 마주친 것이 민망해 괜히 말을 걸었다.

“P 씨, 필라테스 같은 거 배우면 몸이 좀 유연해지겠죠?”


“필라테스도 배우게요? 이것저것 많이 하신다. 정말 대단하네요.”


“아, 몸이 너무 뻣뻣해서, 뭐 수영이랑 같이 할 만한 거 없을까 하고요. P 씨는 뭐 운동하는 거 없어요?”


“운동 신경도 없고 딱히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 성격이라 아무것도 하는 게 없네요.”


“정말? 내가 P 씨 피지컬이었으면 웨이트 열심히 해서 머슬마니아 대회 나갔을지도 몰라요. 진짜로.”


아닌 게 아니라 P는 늘씬하게 키가 큰 편에다가 팔다리가 쭉쭉 뻗고 두상도 작은 편이라 몸의 균형이 아주 잘 맞았다. 임신과 출산을 겪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군살이 없고 근육이 발달한 것은 타고난 장점인 듯했다. P를 볼 때마다 같은 삼십 대 여성으로서 부러운 감정이 들곤 했었던 게 사실이었다.


“에이, 아가씨면 모를까. 전 아줌만데요, 뭐.


심장이 쿵, 쿵, 울렸다.
가장 크고 빠르게.



사랑을 하는 누구나가 그렇듯 연애를 할 때 나는 남자 친구가 된 그에게 나만의 애칭을 지어주곤 했었다. 그 이름이 만들어지고 불릴 때, 그는 진정한 나의 연인이 되었다.


호칭은 그렇게 사회 속 관계를 만들어 내고, 그 관계 속에서 역할을 부여하며 상대를 의미 있는 존재로 전환시킨다. 김춘수의 「꽃」처럼.


이름이라는 것, 호칭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다. 역할을 부여하고 행동을 규정하며 존재의 의미를 따지게 되는.


그러나 아줌마라는 호칭은 단지 여자의 자존심을 뒤트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종종 상대의 아이덴티티와 존재의 의미를 뒤틀고 그저 ‘현역에서 은퇴한 자의 역할’을 강요하곤 했다. 사랑, 꿈, 일, 공부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은근하게, 그러나 당연한 듯이 물러날 때가 됐다며 압박을 해대는 듯했다.

아줌마 국가대표, 뒤늦게 꿈을 이룬 의사가 된 아줌마, 몸짱 아줌마들이 화제에 오른 것은, 그들이 아줌마라는 이름이 부여하는 보편적인 역할에서 벗어난 ‘튀는’ 존재였기 때문이지 않은가.


내가 사랑에 달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인터넷 속 그녀의 아줌마라는 호칭에 움츠러들었던 것은, 아줌마는 아가씨와는 다르다는 P의 말에 그토록 놀랐던 것은, 여전히 나 자신은 예전과 다름없이 사랑에 도전할 가능성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모든 목표가 상실되어 성장의 가능성을 닫았다거나 인생에 통달하여 현역에서 물러난 존재가 아니라 말이다.


그러니 내가 그토록 ‘아줌마’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그 이름이 리즈시절의 종말을 알리는 호칭이었기 때문 만이 아니었다.

목표와 성장, 열정과 동기, 그리고 가능성마저 사그라뜨리는, 그 이름이 지닌 무례함 때문이었다.


그 자체로 찬란히 빛을 뿜던 이십 대의 세계는 지났다. 인생의 리즈시절 또한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나의 존재의 의미를 논할 수 있을까.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온다. 가을이 가고, 언젠가는 겨울이 온다. 매끄럽게 지나가는 이 세계의 변화의 규칙은 당연한 생애 법칙이자 자연스러운 진리일 것이다.


그러나 꽃이 피지 않는 계절이라 해서 가을과 겨울을 의미가 없다 할 수 있을까. 젊음의 한가운데를 벗어났다고 해서 가능성을 잃은 존재라 할 수 있을까. 대체 어느 누가 정의 내릴 수 있단 말인가.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 단순히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그 깊고 넓은 본질의 세계를.


[가십걸] 드디어 가십걸에서 벗어나다
[쉬운여자] 삼십 대 여자는 쉬워야 돼요? 내겐 너무 무례한 세상
[카톡읽씹] 나는 무엇이 두려워서 도피하는가
[삼십대소개팅] 우리는 왜 서로에게 반하지 않는가.

홍마담쌀롱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MVI-WRQYPQFToxaq4Nn04A

인스타그램: @hong_ma_dam

keyword
홍마담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에세이스트 프로필
팔로워 1,118
매거진의 이전글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12 - 카톡 읽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