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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May 18. 2020

흔한 로맨스 소설 #1

진부하다. 진부하다.

     

깔끔하고 담백하지만 도무지 정감가지 않는 흰 회벽 천장, 지나치게 푹신하고 보드라운 베개의 촉감, 무언가 내 머리를 쉴 새 없이 반죽해대고, 망치로 내리치는 것만 같은 고약한 두통, 그리고 내 곁에 나체로 누워있는 한 남자. 무려 삼십사 년간 무교를 고집해온 나도 이 순간만큼은 독실한 신자가 되어 ‘그’를 찾고 싶다. 오 마이 갓. 신이시여. 지금 제 눈앞에 놓인 이것들이 정녕 현실이 맞단 말입니까. 진짜 같은 리얼한 꿈이라고, 그게 아니라면 어딘가 잘못 꼬여 잠시 오류가 난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해주옵소서. 길고 길었던 금욕생활에서 비롯된 욕구불만이 표출된 기막힌 환상 보고 있는 것이라 해주시옵소서.

     

하지만 현실이 아니라면, 지금 내 왼쪽 허벅다리와 맞닿아있는 듯한 상대의 ‘몸’ 어딘가, 그 살결의 감촉, 훈훈하니 따뜻함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 온기는 무어란 말인가.      


윙윙. 수백 마리의 벌떼가 머릿속인지 귓속인지 모를 공간을 시끄럽게 바글거리며 날아다닌다. 단언컨대 ‘현자 타임’은 비단 남자들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깨질 것 같은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한숨 푹 자고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짓누르며 지금 당장 몸을 일으킬 것을 강요하는 내 안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지시가 그 증거다. 살짝 거칠고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이 말간 얼굴의 남자를 지금은 외면하고 싶은 것이 그 증거다. 그를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유의하면서 나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킨다. 발끝을 세우고 힘을 싣는다. 살금살금, 몰래 잠입하는 도둑고양이처럼 사뿐한 움직임으로 방에서 욕실로 잽싸게 넘어간다.  

    

졸졸졸. 소변이 변기를 타고 흐르는 민망한 소리가 혹여 그를 깨울까 괄약근에 힘을 주어 배출의 강도를 조절한다. 졸졸졸.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아주 살짝 돌려 최소한의 물줄기만을 허용하면서, 지난밤의 강렬했던 열정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흉측한 거지꼴을 한 거울 속 낯선 몰골을 들여다본다. 난리굿이라도 벌면서 하기라도 한 거야, 뭐야. 마스카라가 번져 검은 칠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거친 휴지조각으로 조심스레, 그러나 최대한 강하게 눌러 박박 닦아낸다. 한눈에 보기에도 거친 일회용 칫솔에 치약을 넘칠 듯이 듬뿍 짜내곤 재빠르게 입안으로 밀어 넣 밀려오던 욕지기가 이내 사그라진다.      


여느 어수룩한 풋내기가 그렇듯 낭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언젠가,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서로를 감싸 안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아쥐며 달콤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예의라고 굳게 믿었던 적이 있었다. 이른 아침 반라의 상태로 담배를 뻑뻑 펴대는 누군가의 단호한 뒷모습에 상처 입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나도 이제 이 세계의 법칙을 아는 어른이다. 그런 간질간질한 예의 따위 살포시 접어둔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딴 간지러움을 챙길 때가 아니다. 어른의 예의란 달콤한 대화든 시큼한 대화든 간에 이 역겨운 입 냄새를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침부터 정이 뚝 떨어지는 ‘상거지 같은’ 꼴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일반적인 로맨스의 상황이 아닌, ‘안타깝게도’ 드라마의 마지막 화를 가장 먼저 보게 된 듯한 상황이라면, ‘안타깝게도’ 여행의 설렘일랑 집어던진 채 출발하자마자 종착지에 다다르고 만 듯한 상황이라면, 그러니까 ‘안타깝게도’ 충동적인 욕망에 지나치게 솔직했던 상황이라면 더더욱. 유달리 상쾌한 양치의 개운함을 느끼며 나는 이 순간 아주 잠시 숙취에서, 이 꿈같은 잘못된 현실에서 벗어난 것만 같다.

      

정신을 차려보자. 무엇이 나를 이 ‘스페셜 이벤트’로 이끌었나. 사실 이 사건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대체 언제부터? 그러니까 내가 외로움, 무료함, 그리고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라는 진부한 것들에 굴복해 이 남자의 ‘술 한잔하자’는 선(先) 톡에 냉큼 답장을 보내고야 만 그 순간부터. 그날 아침 무난한 속옷을 굳이 챙겨 입었던 그 순간, 첫 잔이 살짝 쓰다는 것을 인식했으면서도, 취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두 번째 잔을 꿀꺽, 한 번에 넘기고야 말았던 그 순간에도. 오늘 일은 우연히 벌어진 것도 아니고, 그의 은밀한 계략도 아니며, 그 누구의 죄도 아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일 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순간 ‘현타’라는 끔찍하고 요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저 이곳에서 도망치고만 싶을 뿐이다. 하지만 대체 왜? 충분히 예상했던 그 길을 자주적으로 따랐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참을 수 없는 것이란 말인가.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욕실에서 방으로, 경계를 넘어오자 침대 위 말간 얼굴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현실과 맞닥뜨린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마치 없던 일인 듯,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듯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말리라, 마음먹었던 굳건한 다짐은 깨졌다. 언젠가 티브이 속에서 본 거대한 몸집의 출연자가 단단한 사과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부숴버린 장면처럼이나 믿을 수 없고, 지저분하게 으깨져버렸다.

     

“가게?”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그의 메마른 입술에서 쩍쩍 갈라진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건조하지 않았던, 그토록 격렬하고 축축했던 어제는 갔다. 엊저녁 퇴근길 영동대교 위에서 내려다본 한강물이 오늘도 똑같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순 없는 것이다. 침대에서 포로처럼 굴종했던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 피학 성향의 판타지 충족을 도왔던 어제의 그 역시 오늘의 그가 아니다.      


흘러갈 것은 흘러가고 마를 것은 말라버렸다.       


“더 자. 나 업무 마무리해야 서 출근해야 돼.”

     

오늘은 토요일. 내 몸의 민감한 부분을 단 몇 번의 손놀림으로 파악할 정도로 세심한 편인 그가 이번엔 내 거짓말을 단번에 알아채지 않을까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면서, 나는 지금 막 꾸며낸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는 어쩐지 안심이 느껴지는 태도로, 다시 몸을 눕힌다. 아니, 사실 조금은 경쾌하게 몸을 눕힌다. 경쾌하게.       


아, 하마터면.      


하늘에 맹세코 애초부터 진지한 로맨스를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낡아빠진 이야기들이라 하더라도 인생의 적지 않은 일들이 여전히 어떤 마법의 힘 같은 것이 작용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지곤 하듯, 이 오래된 관계를 변화시킬지도 모를 미묘하게 섹슈얼한 분위기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가벼운 호감이 생겼다. 그랬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편은 순진무구하고 유치하며 전통적인 서사일지언정 여전히 매혹적이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상했던 진부한ㅡ사려 깊지 않고 무정한ㅡ태도는 알 건 다 안다고 자부할 만큼 ‘성숙’하지만 여전히 ‘능숙’과는 거리가 먼 삼십 대 중반의 평범한 여인을 ‘안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건져내 거칠게 내팽개쳐버렸다.      


끝까지 꺼내 두고 싶지 않았던 사실 나는 기어코 마주하고야 만다. 하마터면, 하마터면 그에게 가벼운 호감이 생길 뻔했다는 것.

      

지금껏 외면하려 애썼던 불편한 진실들까지도 체인을 잡아끌듯 줄줄이 딸려 나온다. 나는 이쪽에 있어서는 결코 가볍거나 ‘쿨’해질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 그는 이 정도 행위에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는 서른여섯의 노련한 남성이었다는 것, 지극히 예민한 나로서는 달콤했던 취기가 사그라지자마자 미리 위험의 냄새를 감지해버렸고, 본능적 자기 방어행위의 일환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것.

     

나의 ‘현자 타임’은 여기에서 온다는 것.


아까부터 끈질기게 내 머릿속을 괴롭히던 통증이 웅웅대며 점점 더 지독하게 울려온다. 그만하자. 더 길게 생각하고 싶진 않다. 기왕 벌어진 일, 지질하게 아무 죄 없는 그를 원망한다거나, 등신처럼 자책한다거나, 어떤 만회의 기회도 얻지 못할 후회 따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참혹한 마음이 더욱 부풀어 올라 뻥, 하고 터져버리기 전에 얼른 챙겨 구겨 넣을 뿐.

     

“먼저 갈게.”     


“응, 도착하면 연락해.”     


아니.

사실 오늘도, 내일도, 아마 한동안은 연락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고.      


난생처음 보는 여전히 낯선 공간. 그를 안에 두고 이 순간 나는 ‘그’ 만큼이나 원숙하고 노련한 여인이 되어 홀로 걸음을 뗀다. 침대에 누워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저 남자를, 사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의식하면서. 어깨를 꼿꼿이 피고, 높고 가느다란 힐에 자신감 있게 올라타 한 걸음 또각.      


무정한 그에게 나 역시 ‘당연히’ 당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사인, 결코 질척이지 않을 거라는 사인,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는 사인을 온몸으로 주면서 다시 한 걸음 또각.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각또각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 새벽, 무려 팔 년 간 유지해온 관계를 망치는 길로 통하게 했던 그 문의 손잡이를 다시금 잡아 돌린다. 철컹, 하는 둔탁한 소리. 끝이다. 당신과 나의 세계를 가르며 문이 닫힌다.           




어제 내가 술을 마셨는지, 팔 년 전부터 무난한 사이로 지냈던 ‘아는 남자’와 잤는지 뭐했는지 알게 뭐야, 라는 태도로 활기차게 내 곁을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 나의 멜랑콜리한 기분과 이렇게 극한으로 대비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상쾌한 아침의 공기.      


그 속에서, 깨질 것 같은 무거운 머리를 달고 흐느적흐느적, 낯선 길을 걷는다.

       

진부하다. 진부하다. 이마저도 진부하다. ‘스페셜 이벤트’도, ‘현자 타임’도, 이 ‘낯섦’조차 너무나도 진부하다.

     

나는, 이토록 진부한 나 자신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인스타그램 @hong_ma_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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