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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드나잇 Jun 20. 2018

이것이 프리퀄일 줄이야

어쩌면 투병일기 #0




6인실 병동이 비지 않아 팔자에도 없던 2인실 창가 쪽 병상에 누워 전철이 한강 다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하루 종일 바라봤다. 나 역시 전철을 타고 수 없이 지나 다녔던 길이다. 내가 다시 저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수 있을까. 아니, 일단 내일 수술이 끝나면, 이 창가로 돌아와 저 풍경을 지금 이 순간처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수 있을까.
















뇌하수체선종.




뇌하수체란 단어는 알아도, 뇌하수체가 호르몬을 분비하는 기관인 건 알아도, 뇌하수체에 종양이 생긴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고, 뇌하수체가 눈 바로 뒤에 붙어 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종양이 커지면 시신경을 눌러 실명이 될 수 있다는 것도. MRI 결과가 뜬 모니터를 멍하게 바라보던 대학병원 담당의의 진료실에서.


"원인은 없습니다."


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종양의 발병 이유가 뭔지, 이 정도 크기면 생긴지 얼마나 된 건지 궁금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모른다, 알 수 없다 뿐이었다. 차라리 다른 암의 흔한 발병 원인처럼 흡연, 음주, 불규칙한 식습관처럼 내 행동 때문이라면 그 동안 잘못 살아온 나를 질책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의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현대 의학으로는 왜 종양이 생기는지 알 수 없다고. 그저 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했을 뿐이라고.


내가 아는 과학의 세계는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세계라 생각했는데 (흠, 본투비 문과생으로 과알못이긴 하다), 나름 첨단 의학을 다룬다는 신경외과 의사가 발병 원인은 딱히 없다고 하니, 이 답답함과 억울함을 어디에다 풀어야 할지 너무나 멍했다. 그저 이 병이 나에게 온 운명을 탓하게 되는 막연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


일단 현실을 부정했다. 아닐거야. 이 병원 별로래. 의사 한 명 말만 듣고 어떻게 판단해. MRI결과지가 든 CD를 들고 더 규모가 큰 병원을 찾아갔다. CT와 MRI촬영의 반복. 그리고 다시 진료실. 침묵을 깨고 두 번째 병원의 의사가 한 첫 마디는 "뇌하수체선종이네요. 이 정도 크기면 수술해야지요." 데자뷔인가.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나마 나은 것이라면, 개두술, 즉 머리를 직접 여는 대신, 코를 통해 내시경으로 제거를 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왜?

왜 하필 뇌에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난데



원인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억울함과 분노였다. 이유도 없다는 병을,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걸린걸까. 그것도 27살에!


지금까지 겪은 힘든 상황 속에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회사가 힘들면 내가 스스로 못해서 힘이 든건지, 아니면 난 열심히 하는데 주변 상황이나 사람이 힘들게 하는건지, 객관적 정보를 모으다보면, 내가 힘든 원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저 내게 주어진 현실이고 받아들여야 할 형벌일 뿐, 정당한 이유가 없었다.


병과 수술에 대한 무서움과 더불어 억울함에 잠들지 못하는 날이 열흘 넘게 이어졌고, 급기야 분노를 삼키지 못해 울음을 토해내다 모든 식구가 이 황당한 상황을 다 알게 되어 버렸다. 가족들이 다 알게 되자, 왜, 라는 물음은 일단 거기서 일시정지됐다. 언제까지나 화만 내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그 사이에도 종양은 조금씩 자라나 시신경을 압박하고 있을 테지. 마음을 추스르고 가족과 함께 내가 들은 진단명과, 앞으로 받을 수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조용히 훌쩍이는 걸 애써 모른척하면서.








새벽부터 일어나 수술 준비를 했다. 간호사가 와서 몇 번이나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고, 여러 사람들이 다가와 이동식 병상으로 나를 옮긴 후 누운 채로 3층 수술장까지 이동했다. 분명 걸어갈 수 있는데 이렇게 하는 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건가. 누운 상태로 천장을 바라보니, 의학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컷처럼, 천장의 형광등이 복도를 따라 긴 기차처럼 줄지어 눈 앞을 스쳐지나갔다.


3층 수술 대기실에 여전히 눕혀진(내 스스로 '누운' 게 아니다) 상태로 들어가니, 마치 다음 공정을 대기중인 제품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침대 채로 누워 나랑 똑같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영화 <다운사이징>의 한 장면 같군.) 내가 들어온 직후, 또 다른 사람이 나처럼 침상에 눕혀진 채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 나를 보곤 놀라며 물었다. "어려 보이는데...무슨 수술 하세요?" "뇌하수체에 종양이 있대요." "아..." 그녀는 짧게 탄식을 했다. 그리곤 초월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암이에요.

잘 될 거예요 우리."


이 분도 참 젊은데, 왜 암이라는 게 찾아왔을까.

병이라는 건 왜 오는걸까. 왜 인생을 짓밟아 놓는걸까.


머릿 속엔 질문만 가득하고 답은 찾지 못한 채 수술장으로 이동했다.








눈을 떠 보니, 다행히도 병실이었다.


수술은 잘 되었으나, 다만 수술 후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라는 것이 그저 '회복'이라는 간단한 단어로 표현될 것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내시경이 통과한 코는 퉁퉁 부은 게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한동안 코로 숨을 쉬지도,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도 없었다. 속도 좋지 않았다. 자꾸 메스껍고 구역질이 올라와 토해보니, 피였다. 영화 <바람난 가족>의 가장 연극적인 장면이었던, 머리 위로 핀 조명을 받은 채로 가족들이 에워싼 가운데 투병 중이던 시아버지가 흰 가운 위에 새빨간 피를 토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정말 그렇게 새빨간 피를 왈칵 쏟아냈다. 수술하면서 머리에서 떨어진 핏덩어리가 미처 제거되지 못하고 코를 통해 식도로 넘어가며 목에 걸렸다고 하더라. 급히 이비인후과에 외래 진료를 가서 목구멍에 걸린 핏덩이를 빼냈다. 젤리처럼 탱글탱글한 게 너무나 징글징글했다. 집에 와서는 더 가관이었다. 원인 모를 멍한 두통이 여전해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 지냈는데, 조영제를 투여했을 때 갑자기 몸에 불 붙은 듯이 열이 오르는 것처럼 갑자기 뜨거워져서 숨을 쉴 수도 없었고,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그냥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수술', 단지 그 하나로 끝이 아니구나 싶었다.


예상치 못한 일은 또 일어났다. 시신경을 누르던 종양은 사라졌지만, 수술의 여파로 갑상선 호르몬은 일반인의 절반 정도밖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아무래도 수술할 때 그 부분을 건드렸는지, 갑상선 저하증 환자처럼 평생 호르몬제를 먹으며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수술 직후 먹은 진통제처럼 한동안 먹다가 이제 그만 먹을 줄 알고,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간 자리에서 담당의에게 지나가는 말로 '이 약 언제까지 먹어요?' 라고 물어봤다가 정통으로 얻어맞은 그녀의 정색하는 표정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이거, 평생 드셔야 해요."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벙찐 나의 표정을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직접 못 봐서 다행이다.






매일 아침 7시, 일어나자마자 공복에 씬지록신 한 알을 먹는다. 그 때부터 7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줄곧. 비타민은 고사하고 아프다며 지어놓은 감기약도 가끔 건너뛰는 나였는데, 이건 머릿속에 깊이 각인이 되었는지 일어나자마자 반사적으로 약을 찾아 먹게 된다.


조금은 의연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병이 아니어도, 삶을 살아가며 이런저런 힘든 일이 찾아오지만, 조금은 초연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티고 참을 수 있었다. 웬만한 어려움은 참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남들과 건강검진 이야기를 하다가 몸에 혹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무용담처럼 "난 그 혹이 머릿 속에 있었는데, 수술 받아서 떼어냈어"라며 남들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즐긴 적도 있다.






왜냐하면 난 그게 내 인생에 더 이상 오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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