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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드나잇 Jul 11. 2018

지금의 마음을 영화로 답한다면

어쩌면 투병일기 #2

<침전기>(이송이, 2001)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학교에서 바느질에 심취해 있던 학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실수로 바늘을 삼켰다고 생각하곤, 바늘이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들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바늘을 삼켜서 전전긍긍하는 주인공 앞에 칠판에 쓸데 없이 긴 수학 공식을 적어놓고 주인공이 몇시간 안에 죽을 거라고 정 없이 이야기하는 안경잡이 클래스메이트가 불안감을 돋운다. 어쨌든 이래저래 별 짓을 다 해보지만 딱히 방법이 없자 주인공은 슬픔에 잠겨 유서를 쓰고 잠든다. 그리고 알람시계 소리에 깨는데, 하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찬송가(?)가 알람음악이고 알람을 끄는 버튼을 누르면 '아멘'. 하는 소리가 나는 요상한 시계다. 그래도 알람을 듣고 일어나다니, 난리부르스를 췄던 하루가 무색할 만큼 주인공은 잘 살아남았다. 비록 책상에서 잠들었다 깨긴 했지만.


그 영화를 봤던 건 한창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호기심이 정점에 달했던 열일곱 무렵이었다. 당시 KBS에는 <독립영화관>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평일 새벽에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도 용케 이런 게 있다는 걸 알아내서 개근상이라도 받을 기세로 성실히 보고, 또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꼬박꼬박 녹화까지 했었다. 소개된 영화 중엔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 것도,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훌륭한 작품들도 많았지만(유명 감독들의 초기작이라든가-이를테면 봉준호의 <지리멸렬>같은), <침전기>는 많은 이들에게 전자 쪽이었나 보다(검색을 아무리 해도 나오지 않는다. 씨네21의 단신이 거의 유일한데, 이 글을 쓴 조영각 아저씨에겐 딱히 이 작품은 너무 가벼워 별 감흥이 없었던 듯. 너무나 단호한 문장이 좀 웃겼다.). 하지만 짧은 영화를 본 지 20년을 향해 가는 지금까지도 내게는 16mm 필름 영화의 초록초록한 톤과 여고생들의 일상, 조금은 과도하지만 충분히 공감가는 주인공의 감정선, 쫄깃했던 편집감까지 참 선명하게 남아있다. 뭔가 쓰고 찍고 남기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아무것도 몰랐던 열일곱의 내가 당시 딱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 같았기 때문일까.




아직 확실하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걱정을 참 미리 많이 하는 스타일인 나는, 암 확진 판정을 기다리며 길거리를 쏘다니는 주인공의 리얼타임 동행기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아녜스 바르다, 1961) 속 클레오는 암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속에서 심란한 시간을 보낸다. 가수로서도 잘 나가고, 아직 아름답고 젊은 그녀에게 죽음이라는 건 쉽게 어울리기 힘든 일이라 그녀는 더욱 과장되게 절망적이다. 그런 복잡한 심경 속에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친구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면서 대화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한 삶의 감각을 일깨운다. 대학 시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땐 미처 이런 생각을 못 했는데, 지금 보니 <침전기>의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영향을 받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암 대신 바늘로 인한 내출혈로, 파리의 가수 대신 고등학생으로, 두 시간 동안의 이야기가 하루 반 나절 정도의 이야기로 바뀌었을 뿐. 의연하기보다는 호들갑스럽고 감정이 들쭉날쭉하지만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주인공이, 참 닮았다.




나란히 놓고 본 두 영화는 내가 지금껏 살면서 좋아서 어쩔줄 모를 정도로 벅찬 마음으로 사랑했던 작품은 아니지만, 영화를 평생 가져갈 나만의 무엇으로 마음에 고이 새기던 시절에 접해서 그런지 잔상이 많이 남아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나는 긴가민가한 상황에서는 더 과도하게 걱정하고 심하게 미리 낙담을 해 둬야 나중에 타격이 덜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라, 비록 나중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밝혀져 내 행동이 우스꽝스럽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미리 마음에 예방주사를 놓듯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대비를 하는 게 편하다. 그래서 의심 소견을 받은 병의 확진을 앞둔 지금 하필 이 두 영화가 생각났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이 두 주인공처럼 아무 일 없이, 그저 이 걱정이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다행히 나는 클레오보다도 나를 돌아볼 시간이 더 많이 주어졌다. 정말로, 이 소동의 역할이, 딱 그 만큼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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