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투병일기 #1
뇌동맥류 의심 소견입니다. 상급 기관의 진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처음 읽었을 때는, 아니 이번엔 또 뭔 소리야, 심드렁하다가, 상세 페이지에 자세한 설명이 나오자 자세를 고쳐 잡았다.
'우측 내경동맥 분지부, 2mm 크기 미만의 혈관돌출 - 미세동맥류의심 - 상급기관 진료요.'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동맥류는 또 뭐야?
낯설었던 뇌하수체선종처럼, 뇌동맥류라는 새로운 말이 또 다시 내 일상으로 파고들려 하고 있다.
뇌동맥류.
뇌혈관 벽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비정상적으로 부풀어오른 혈관 질환.
뇌동맥류가 발생하는 정확한 원인은 아직 모른다. 다만 동맥 가지나 근위부에 주로 발생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혈역학적으로 높은 압력이 가해지는 부위에 후천적으로 혈관벽 내에 균열이 발생하여 동맥류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뇌동맥류가 터져 출혈로 인해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와 뇌동맥류가 주변 신경조직을 압박하여 비정상적인 신경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출혈 자체로 인해 뇌막이 자극되어 오심, 구토나 뒷목이 뻣뻣한 증상이 나타나며, 심한 경우에는 밀폐된 공간인 두개골 내의 압력이 올라가면서 상대적으로 뇌가 심하게 압박되면 의식 저하 또는 혼수 상태에 빠지거나, 심한 경우에는 병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하기도 한다.
출혈의 증거가 없는 경우, 동맥류 자체가 주변의 구조물을 압박하거나 아주 미세한 출혈로 인해 주변 뇌신경의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거대 동맥류의 경우 뇌종양과 같은 압박 증상을 잘 동반하며, 후교통동맥에 발생한 동맥류의 경우 제3번 뇌신경과 가까이 위치해 있어 눈꺼풀 처짐, 복시 등과 같은 증상이 간혹 동반된다. 최근에는 아무런 증상 없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건강 검진이나 다른 질환으로 뇌 자기공명영상(MRI)이나 컴퓨터 단층촬영(CT)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는 빈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뇌동맥류 [cerebral aneurysm]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
또 시작이냐.
마치 다른 사람의 검사 결과를 잘못 전달한 의사 때문에 한동안 코피를 비롯해 몸에 일어나는 모든 증상들이 뇌종양 때문이라 생각했던 영화 '아는 여자' 속 동치성처럼, 건강검진 결과지와 뇌동맥류 검색 결과를 본 이후로는 왠지 최근 빈번히 일어난 두통도, 오른쪽 눈꺼풀이 쳐지고 눈알이 빠져나올 것 같은 느낌도 다 뇌동맥류 때문이었나 싶어 괜스레 겁이 나고 우울했다. 전문의들은 별 연관성이 없다 말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의학적 지식 하나 없는 범인의 입장에서는 '뇌'와 관련된 질병과 연관된 것이 처음이 아니다 보니 자꾸 머릿속을 파고드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내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일단 의심 소견이 있다고 하니 빠르게 정확한 진료부터 받는 게 좋겠다. 이미 병력도 있으니 자연스럽게 다니던 병원에서 뇌동맥류 담당의를 찾고 가장 빠른 진료일자로 예약했다. 가장 빠른 진료일은 앞으로 한 달하고 일주일. 앞으로 5주 동안 진료일을 기다리면서, 얼마나 기분이 찝찝할지.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었지만, 아니 그래서 더, 참을 수 없게 기분이 나빴다.
남편은 어디까지나 의심 소견이고, 정확한 진료를 받기 전까지는 뇌동맥류가 있다고 볼 수 없으니 진료일까지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가지라고 했다. 그래, 진료일에 의사 이야기를 듣고, 검사를 해 보면 기든 아니든 결론이 나겠지. 하지만 그 진료일이 다가오기를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기다리기란 너무 어려운것.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엔 나는 여전히 6년 전의 수술과 그 극복 과정을 또 겪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멘탈이 흔들리는 일개 사람일 뿐이다.
기분이 이렇게 더러운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이 옷가지와 물건 정리가 덜 된 방을 보며
"넌 꼭 네가 여기 있다는 티를 내"
라는 말을 하자마자, 순간 완전히 마음이 터져버렸다.
"그럼 사람이 있으면 티가 나야지, 내가 없어져서 여기 있는 물건들이 다 사라지면 좋겠어?"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만에 하나 또 수술을 해야 한다면. 혹시나 수술을 하다 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내가 이 집에서 물리적으로 차지하던 공간이 사라진다면. 내 물건들은 무엇이 될까.
안그래도 우울하고 착잡한 상황인데 하필 그런 말을 해?
역사든 뭐든, 기록된 것들만이 기억된다. 내가 뭐라고, 사라진다 한들 내 마음의 진의와 나란 사람의 실체를 내가 남긴 조각들만 보고 하나하나 유추해서 연구할 사람이 딱히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여기 이런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며 이렇게 살았다는 걸 그나마 가장 정확하게 남길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의 기록밖에는 없다. '뇌 속에 숨겨진 시한폭탄'이라는 뇌동맥류의 별칭을 생각할수록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채로, 아무 단서도 남겨두지 않은 채로 갑자기 어느 순간 사라져서는 절대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뭉게뭉게 피어오른 의심 소견이 확진이든, 오진이든 정해지는 그 날까지, 조금이나마 나에 대해서 기록해 보려고 한다.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온갖 것들에 대해 적어 보겠다. 온갖 싫은 것들 투성이인 삶 속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 때문에 버티고 또 버텨 온 날들이니까.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빌려 나라는 인간이 가장 또렷하게 보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든다.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동기로 시작한 일이지만, 나쁜 생각이나 싫어하는 것들보다 나를 두근거리게 하는 것들을 적으며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으로도 우울한 기분을 떨쳐 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