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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드나잇 Aug 12. 2018

날마다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며

어쩌면 투병일기 #3 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

검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류이치 사카모토:코다>를 봤다.


아주 오래 전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된 좋아하는 뮤지션의 다큐멘터리이기에 내 상황이 이렇지 않았어도 챙겨 봤을 것 같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인후암 발병 소식을 알게 된 후의 이야기라 더욱 관심이 갔던 것이 사실이다. 젊은 시절부터 인정 받고 주목 받아 온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진 세계적인 뮤지션도 나이가 들면서 병이라는 것에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이 참 허탈하면서도, 과연 이런 사람은 위기 앞에서 자신의 삶과 일을 어떻게 꾸려갈까 궁금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전에 반대하며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오던 그에게 인후암 판정은 생각지도 않은 불청객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웬만한 사람은 자기 인생을 계획할 때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난치병'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강철같은 사람도 병 앞에서는 적잖이 흔들리고 충격을 받을 테고 그 역시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이 다큐에서는 느닷없는 암 판정으로 인해 놀라고 고통받았던 그의 심경은 짧은 일기로 대신하고, 이미 그 감정의 파고가 지나간 이후 그가 어떤 작품을 만들고 살아가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많은 거장들이 노년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본질적인 것부터 탐구하기 시작하듯이, 그 역시 암 발병 이후 원래 작업하던 것을 중단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사운드 그 자체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려 머리에 바스켓을 뒤집어 쓰고, 숲 속에서 자연의 소리를 담고, 북극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담으며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기도 한다. 조용하지만 신중하게 소리 하나하나를 담는 데 열중하는 것을 보며 병이라는 것이 오히려 새로운 집중력과 열정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렇게 게을렀던 내가 어떻게든 지금의 감정과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며 부지런히 끄적여대는 것처럼.


그러나 '새하얗고 새로운 캔버스 앞에서, 내가 정말 듣고 싶은 소리만 넣고 싶다'는 그의 간명하고 또렷한 마음은 어찌 보면 이미 이룰 것을 다 이룬 사람이기에 가능한 태도인 것도 같다. 80년대 전자음악의 선도적인 뮤지션으로 시작해 영화 배우로도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거장들과 영화음악을 만들고, 환경에 대한 관심을 갖고 다양한 사회적 활동은 해온 그는, 이미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음악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사운드에 주목하는 경지에 다다라 있었던 사람이다. 꼭 암이라는 계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는 어느 시점이 되면 그렇게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결국 그렇게 본질로 돌아가는 시도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하고 싶은 것 언저리에도 가지 못한 내게 생각지도 못한 병이 갑자기 닥쳐온다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남겨야 할까. 지금 당장 뭐라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만 해 두고 꺼내놓지 못한 그 많은 것들 중 단 하나라도.


그런 의미에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자신의 음악에 인용한, 영화 <마지막 사랑>의 내레이션은 묘한 의미로 다가왔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 여긴다.
모든 건 정해진 수만큼 일어난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의 오후를 얼마나 더 기억하게 될까?
어떤 오후는 당신의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날일 것이다.
네다섯 번은 더 될 지도 모른다. 그보다 적을 수도 있겠지.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어쩌면 스무 번.
모든 게 무한한 듯 보일지라도.









그 후, 결과를 들으러 아침부터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판독 결과 오류, 같은 해프닝같은 결과를 바랐는데 아쉽게도 종합병원 의사 소견으로도 미세 동맥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단다. 다만 아직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 6개월 후 CT를 다시 찍어보기로 했다.


6개월은 벌었지만, 모르고 살았다면 몰라도 언제 시한폭탄처럼 터질 줄 모르는 혈관을 가진 채로 살아야 한다는 건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다. '모든 게 무한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인생의 유한함이 새삼 살짝 부풀어올랐다는 뇌 혈관 어딘가에 콕 붙은 것처럼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함부로 내뱉던 말 한 마디도 조심하고, 그저 늘어져 불평만 하는 것으로 하루가 버려지지 않도록 아껴가야겠지. 바흐의 곡을 연습삼아 연주하며 이제 날마다 손가락을 움직여 볼 생각이라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말처럼, 나도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여 하루와 그 하루로 이어질 삶을 채워나갈 생각이다. 내 인생 어떤 부분의 단면을 보아도 치밀하고 정성스러운 결이 느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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