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적 자유부인의 점심 산책 첫날
점심을 먹지 않고 서울 산책을 하기로 한 건, 앞서 밝힌 비장한 각오도 있었지만 여독이 풀리지 않았던 탓도 있다. 1년 늦은 입사 5주년 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면서, 2주라는 시간을 알차게 쓰지 못했다는 사실에 너무 허탈했기 때문이다.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기로 한 당초 계획도 다 실천을 못했으며, 제주도도 그 규모와 볼 것에 비해 턱 없이 모자란 2박 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머물렀다. 이제 겨우 스트레칭을 마쳤는데, 달려보지도 못하고 레이스가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날씨는 어찌나 좋은지, 제주도에서도 미세먼지 때문에 못 보던 새파란 하늘을 보니 이건 도무지 걷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불어난 몸으로 인해 체중조절도 필요하던 시기였다. 겸사겸사, 팀에는 점심시간에 운동한다고 이야길 했지만 실은 봄바람에 못 이겨 마실을 나간 셈이나 다름없었다.
행선지도 정하지 않고 운동화 끈만 조여 맨 채 사무실을 나섰다. 그냥 사람들 많은 곳 근처로 흘러 흘러가다 보니 어느 새 덕수궁 돌담길이었다. 나만 봄바람이 난 게 아니었다. 나 회사원이오, 하고 목에 사원증을 건 사람들이 살랑이는 바람에 들뜬 얼굴로 남녀 할 것 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무슨 시청 주변 회사원 걷기 대회라도 연 것 같았다. 인파에 밀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중간중간 사람들이랑 부딪힐 뻔할 정도로 사람이 참 많았다. 이 정도면 최종 면접 때 했던 생각은 기우였던 것 같다.
덕수초등학교 쪽으로 빠져나와 새문안로로 나오니 갑자기 시선을 확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벚꽃이었다.
제주도에서 필 듯 말 듯 애매한 벚꽃만 보다가 갑자기 저 혼자 만개한 벚나무 하나를 보니 눈이 다 시원해졌다.
재미있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똑같은 마음이었는지 다 같이 스마트폰을 들어 벚꽃 사진을 연신 찍어대는 거였다. 나는 벚꽃 사진 찍는 바로 그 사람들을 찍었다. 얼굴 표정을 못 보고 뒷모습만 보는데도, 마냥 들떠 있는 게 다 보였다.
시간 상 턴을 해야 할 때가 됐지만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건 왠지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큰길로 나가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건너갔다 경희궁을 찍고 정동길로 돌아왔다. 한 시간 내에 도보로 이동하는데 벌써 고궁만 두 개를 지났다. 이러니 저러니 말도 많은 회사지만, 위치 하나만큼은 정말 위로가 된다. 높은 빌딩 숲 속에 아직까지 살아 숨 쉬는 오래된 공간들이, 그나마 숨 쉴 틈을 준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이렇게 살았다.
2016년 4월 5일 오후 12:08, 총 4.57km, 45분 34초.
덕수궁 돌담길~서울역사박물관~경희궁~정동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