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적 자유부인의 두번째 점심산책
첫 산책 후 이틀이 지났다. 연초부터 휴지기 없이 업무가 쏟아지는 상황이라 당분간은 외근이나 업무가 있을 때면 매일 산책은 어려울 것 같다. 그럴수록 '점심시간=산책'을 디폴트로 포지셔닝을 단단히 해 두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다행히도 팀장님과 팀원들은 잘 이해를 해주시는 듯 한데, 도리어 내 쪽에서 문제인 게 하나 있다.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점심시간밖에 없다 보니 이 산책의 주 목적이 무엇인지 갈팡질팡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건 많고, 시간은 하루에 딱, 한 시간 뿐이니. 점심산책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 속에는 봄 마실과 운동이라는,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들여다 볼수록 한참 다른 목적이 동상이몽을 하고 있으니 걸으면서도 머릿속이 참 복잡하다. 날도 좋고, 바람도 좋고, 볼 것도 많은데, 조금 쉬엄쉬엄 구경하면서 갈까? 아냐, 안그래도 시간도 없는데 최대한 빨리, 많이 걷는 게 좋겠어.
아직 둘째날이라 그런지 이 날은 그런 갈등이 참 심했다. 우선 서촌 끝,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목적지로 잡았는데, 서촌까지 가는 길이며 박노수 가옥이 있는 그 골목을 그냥 파워워킹으로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또 멈춰서서 오밀조밀한 가게들을 세세히 들여다보거나, 미술관에 훌쩍 들어가 충분히 감상을 하고 나올 수 있는 시간도 아니니, 그저 주위 배경이 지루하지 않은 러닝머신 위를 걷고 있는 것과 같았달까. 참 감질나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일 점심에 시간을 내 다른 거리도 아니고 무언가 자신만의 것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자리인 서촌 골목을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은 날이었다. 젠트리피케이션 얘기가 나온 지 오래라지만, 그래도 상수동 연남동 가로수길 일대보다는 아직 특색을 잃지 않고 우직하게 남아있는 듯한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픈하는데 돈깨나 들어갔겠지만 돈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듯 줏대있어 보이는 공방들하며, 세월호 2주기를 기리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는 여러 가게들, 뭔가 단순한 건물의 임대 및 매매 계약 그 이상의 것을 구현하려는 듯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의 부동산까지. 아직은 부족해 때가 아니라 여기지만 이 회사에 그대로 남을지, 이직을 할지, 나만의 것을 시작해야 할지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상황에서 이미 뭔가를 시작하고 이루고 있는 현장을 잠깐이나마 바라보는 건 큰 공부가 됐다고나 할까. 배운 걸 어떻게 적용할지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박노수 가옥을 지나 슬슬 언덕길이 시작되고, 금세 인왕산 수성동 계곡이 보였다.
서울 도심에 이런 조용한 동네가 있다는 것도 참 고마운 일인데, 기품있는 산세를 지닌 산이 이렇게 떡 하고 나타나니 더욱, 곧 죽어도 서울, 다시 한 번 속으로 외치게 됐다. 시간이 다 되어 아쉽게도 더 높이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다음번을 기약하기로 했다. 발걸음을 돌리는데 때마침 정말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운동복 차림으로 산을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매일 아침 도심에 진입하려면 한 시간이 넘는 지하철 여행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눈을 뜨면 도심인 이 곳 주민들의 삶이 참 궁금하고 또 부러울 따름이다. 점심 잠깐이라도, 그런 경험을 맛보기로나마 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2016년 4월 7일 오후 12:26, 2.37Km, 25:27
회사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 (기본요금 거리)
광화문부터 걷기 시작해서 실제로 걸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시간에 쫓겨서 더더욱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