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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드나잇 Apr 30. 2016

2016년 4월 8일, 남산

한시적 자유부인의 점심 산책 셋째 날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에 진해 군항제에 갔던 것 외에는, 굳이 벚꽃철에 명소에 들러 꽃구경만을 위한 유람을 한 적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벚꽃은 좋아하지만 유명한 곳일수록 꽃보다는 사람 구경일 때가 많아 일부러 피한 것도 있고, 더 근본적으론 굳이 본격적인 꽃놀이에 목적을 두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럽게 매년 그 시기가 되면 피어나는 꽃을 우연히 걷던 길에서 만나는 반가움, 딱 그 정도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지 올해는 벚꽃에 집착을 조금 하게 됐다. 벚꽃 개화 시기와 얼추 맞물려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니, 내가 언제 벚꽃철에 (심지어 왕벚나무 자생지라는) 제주엘 가보겠냐 싶어 제주 벚꽃 명소도 검색하며 이런저런 준비를 열심히 했더랬다. 특히 타이밍이 잘 맞으면 만개한 유채꽃과 벚꽃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동부의 녹산로!는 내 반드시 가보리라 그렇게 다짐을 했는데... 결론은 가기는 갔지만 아직은 피다 만 벚꽃에 뭔가 어리둥절한 느낌만 들었다는 아쉬운 이야기...


짧았던 제주에서의 3일이 계속 미련에 남았던 건 이렇게 기대했던 바를 다 못 이룬 데 이유가 있을 터. 여전히 봄바람에 미쳐 날뛰고 있는 속은 서울에서라도, 나 혼자서라도 벚꽃을 봐야 한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결국 이번 산책은 여태껏 가장 명확한 목표를 지닌 채 시작되었다. 보자 벚꽃을! 가자 남산으로!


사실 회사가 숭례문 바로 앞이라 남산이 지척이라, 여유 있을 때 팀원끼리 점심 먹고 산책을 여러 번 갔어도 이상하지 않을 곳인데 6년을 다니며 많은 팀을 거치는 동안에 한 번도 팀원들과 남산을 가 본 일이 없었다(이 낭만 없는 사람들...). 외근 가는 길에 강남으로 넘어가느라 소월길을 차로 지나가기만 했을 뿐, 내 두 발로 직접 꼭꼭 밟아 걸어 본 적이 없던 그 길. 어두운 등잔 밑을 오늘은 내 스스로 좀 밝혀 보기로.




회사에서 가장 빨리 남산에 오르는 길은 숭례문을 지나 남산 그린빌딩을 거쳐 힐튼호텔 앞에서 남산공원으로 진입하는 것이지만, 돌아올 때 그쪽 길을 이용하기로 하고 우선 명동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명동역에서 골목을 통해 3호 터널 방면으로 오르막길을 걷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작은 주택들이 나와서 조금 놀라기도. 게스트하우스로 바뀐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반 가정집이어서 새삼 나도 모르던 생활이 있었음에 신기했고, 혹여 생활공간에 행인의 발걸음이 닿는 게 불편할까 걱정되어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남산오르미 지점까지 다 오르니 이젠 너무 익숙해서 별로 감흥이 없던 서울타워가 시야에 들어온다. 또 막상 이렇게 보니까 반갑기도 하네. 그리고 본격적이진 않지만, 노란 개나리와 함께 분홍빛 벚꽃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또 남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케이블카. 마지막으로 케이블카를 탄 게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한데, 매일같이 이렇게 운행을 하고 있었을 케이블카를 보니 기분이 묘하기도. 산을 오르는 케이블카를 따라 자연스레 시선이 알록달록한 꽃나무들로 이어진다. 고개를 내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길 따라 흩날리는 벚꽃이 기분을 황홀하게 했다.  내 뒤로는 중국어가 잔뜩 들렸는데, 이 사람들은 참 운이 좋다고 느껴질 정도로 딱 좋은 계절, 딱 좋은 날씨였다. 단체관광객을 피해 공원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한적해진 길, 등산복 차림의 중년 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별 것 아닌 듯하면서도 그냥 좋았다. 벚꽃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저 사람들에게는 오늘이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모두들 알고 있듯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아쉽게도 발걸음을 돌려 다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소풍을 나온 초등학생들이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다고 분주했고, 성곽길에는 점심 먹고 산책을 나온 듯한 회사원들이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벚꽃을 보기 위해 올라왔지만 그 보다 더 많은 걸 만났던, 짧지만 꽉 찼던 시간. 이제는 오후를 준비해야 할 때다. 






2016년 4월 8일 오후 12:08, 4.5Km, 45:11


어째 의도한 건 아닌데 경로가 원형으로 깔끔하게 떨어졌다.

내용상으로도 지금까지의 산책 중에서 가장 꽉 찬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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