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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ka GG Sep 28. 2020

해는 많이 짧아졌고, 할 말은 아직도 많아서

제주, 두 번째 9월

| 지나간 계절, 다가온 계절  


지난 8월 한 달, 한여름의 절정에서 계절이 바뀌어감을 느낄 때까지 빈틈없는 쉼과 먹부림의 나날이었다. 지금까지 1년 그리고 6개월을 지내고 있는 제주에서 가장 충만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날이 좋으면 무조건 밖으로 뛰쳐나가 오름을 오르고, 올라가느라 차올랐던 가쁜 숨을 돌리러 바다로 수영을 하러 가고,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으로 또는 누군가의 집으로 모여 함께 시간을 보냈다.

모두 당분간 백수가 된 전 직장 동료이자 이제 언니, 누나, 동생이 된 제주에 있는 유일한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같이 보낸 하루하루는 즐거웠고 또 즐거웠던 시간으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달이 바뀌며 두 번의 강한 태풍이 지나가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불어온다. 가을이 찾아왔다. 제주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9월이다.

늘 함께였던 동료이자 친구들은 이제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다시 육지로 돌아가 북적북적한 도시생활 속에서 조금은 한가하고 느리게 흘러가던 제주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는 이곳 제주에서 곧 시작될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나는 매일 같은 날 다른 해의 추억을 알려주는 클라우드의 알람 덕에 작년 이맘때에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를 돌아보며, 당시에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내년 이맘때를 여전히 제주에서 보내고 있다. 무계획을 계획으로 삼으며 흘러가는 별것 없는 하루는 이전보다 길어졌고, 해는 많이 짧아졌다.


가본 적 없는 탄자니아 같았던 제주 서쪽 어딘가의 가을 하늘





| 육지의 버거움을 섬으로 띄워 보내 줘


계절이 바뀌어 가는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미워 죽겠는 누군가에 대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원초적인 사랑의 감정에 대해 그러다 갑자기 망가져 가는 환경으로 화가 많이 난 지구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하다 결국은 우리 사는 이야기로 돌아간다.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걸로 괜찮다고 했다. 낭만도 있고 외로움도 있는 이 섬에서 일로 만난 사이지만 매일 같이 보낸 일상으로, 그 안에서 서로를 쓰다듬고 위로하던 한마디 말로, 버거울 때 잠시 기댈 수 있게 무심히 내어준 어깨 위로 시간이 쌓이고 추억도 쌓다. 이제 우리 제법 좋은 친구가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나눴던 마지막 인사는 너무나 아쉬웠다. 다시 못 볼 것도 아니지만 섬이 아닌 뭍으로 돌아가는 누군가와, 섬에 남아 있지만 또 다른 섬에 있는 것 같은 생활은 우리를 이전처럼 이어 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전 같지 않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소하고 잡다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는 지금, 롱디스턴스 프렌드쉽을 잘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종종 육지의 버거움을 섬으로 띄워 보내준다면 그것마저도 고마울 것 같다.


저녁 느즈막하게 넘어가던 해는 이제 6시가 조금 넘으면 수평선 아래로 떨어진다





|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만남과 헤어짐의 무한반복인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외롭지 않게 돌보며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지난달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일을 정리하면서 '상황은 안 좋지만 나는 괜찮다'라고 말해왔는데, 속을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안은 텅 비어있었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마저 없었다. 스스로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에 텅 빈 속을 다시 채우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 좋을 때 무조건 밖으로 뛰쳐나가 하루를 꽉 차게 보내면 다시 채워질까 싶었지만, 다시 한번 내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렇게 해서 채워질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로워 못 견디겠는 것도 아니었다. 지치고 힘들었던 시간을 제때 알아주지 못해 나 스스로에게 상실감이 깊어진 것 같다.


앞으로 사는 데 있어 모든 '열심히'하는 것은 지양하기로 했다. 열심히만 산다는 건 어쩌면 맹목적임을 알았기에. 목적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건, 자신을 너무 외롭지치게 함을 이제 더 겪어보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는 짬이 생겨서.


 그것보다 '잘'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크다. '열심히' 산다는 게 태도의 관한 이야기라면 '잘' 산다는 건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과정만큼 중요한 게 결과인 것도 이제는 잘 알아서 조금 더 결과론적으로 살아볼까 싶다. 결과가 있어야 과정도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살아갈 때 불쑥불쑥 찾아오는 막연한 두려움과 외로움도 잘 타일러 보낼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오늘 하루 거진 다 흘러가 벌써 깜깜한 밤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해는 많이 짧아졌고, 할 말은 아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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