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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 Apr 14. 2024

결혼 후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Entj 결혼생활

최근에 한국 원래 나이로 40줄에 접어든 탓인지 몸이 많이 아팠다. 첨엔 단순 감기였으나, 여러 가지 개인사가 겹치며 병이 점차 커졌다고나 할까. 그 가운데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단연 남편이었다...


한 달 전쯤부터 남편 얼굴이 유독 그늘지고 어두웠다. 괜찮냐고 물어봐도 늘 그렇듯 괜찮다고만 하니 눈치 없는 난 또 그런 줄만 알았다. 최근에 감기 걸려서 면역력이 떨어졌나, 운동부족인가 싶어 몸이 안 좋은 와중에도 청국장에 봄나물 비빔밥, 주꾸미 미나리 덮밥, 냉잇국, 쌈채소 등등 신나게 차려주고, 억지로라도 2~30분 걷자며 집 앞으로 남편을 끌고 나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운동하자고 할 때마다 유독 어두워지던 그의 표정을.. 왜 몰랐을까?


운동을 시작한 첫날, 남편은 10분 만에 화장실을 가더니 한참 뒤에야 나왔고 난 진지하게 물었다 "오빠 치질이야? 아님 바람피워?? 집에서 나오기 직전에도 화장실 갔잖아. 뭔 일 있는 거야?!" 남편은 한참 뒤에야 "아~~~~ 뉘....."라는 말뿐.


담날 만보 걷자며 또 끌고 나가려고 하니, 그제야 고백할 게 있단다.

"실은 엉덩이에 종기 같은 게 났는데 계속 고름이 나와서 닦으면서 걷느라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한 거야... 앉는 게 힘들어서 헬스장 가기 싫어한 거고 걷는 것도.. 신경 쓰여서..ㅜㅜ"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얼마나 심한데, 나 때문에 더 심해진 거야??"


사연인즉슨, 남편은 거의 한 달간 엉덩이 종기로부터 고름 사채 빚에 시달렸고, 나한테는 말을 못 하고 혼자 끙끙거리다가 얼굴은 그늘지고 낫빛이 어두워졌던 거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내가 계속 운동 가자고 끌고 나가니 결국엔 실토를 하게 된 거고... 말을 하고 나니 그래도 혼자서 고민할 때보단 맘이 편한지 얼굴이 좀 밝아졌다.


난 얼른 약국에 가서 고약과 소독약 등을 사 왔고, 엉덩이 좀 보자고 했다. 웃기지만, 남편 엉덩이를 결혼 9년 만에 첨 봤다. 그런 부분(?)으로는 매우 예민한 그이다...


실제 보니 종기 사이즈가 고약 같은 걸로 될게 아니고, 당장 수술해야 할 정도였다.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엉덩이에 달린 느낌이랄까?? 추진력하난 갑인 나는,

"오빠 이거 수술해야 해. 항문외과 잘하고 큰 병원 월요일 첫 타임 예약했어. 일단 푹 쉬고 낼 바로 수술하자~!!"


남편은 고름 사채에 하도 시달려서 그런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순순히 알겠다고 했다.

 

군대도 다녀오고, 에베레스트 등반에 스카이다이빙, 세계최고 높은 곳에서 번지점프까지 한 남편은... 무섭다, 병원 혼자 못 간다, 같이 가달라, 손잡아 달라.. 해서 결국 나까지 연차 쓰고 병원에 따라나섰다.


병원에 남편처럼 덩치 큰 환자들이 몇몇 보였는데 여자는 내가 유일했다(남편 따라온 거라고 일일이 말할 수도 없고, 호호..;;). 간단한 진료 이후 수술이 진행되고, 의사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엉덩이 속에 계란 덩어리 하나를 꺼냈단다.. 종기가 눈에 보이는 건 빙산의 일각이라나 뭐라나!


암튼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집에 와서, 엉덩이에서 계란만 한 것을 꺼낸 남편은 2주간 항생제인지 약을 먹어야 했다. 뭐든지 체력이 좋아야 빨리 낫겠다는 생각에 건강식단으로 삼시세끼 9첩 반상을 차리고 새벽마다 일어나 거즈를 갈아주고(이제 거의 간호사 수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보필했고 남편은 4주 만에 엉덩이 살이 다 차올라 그저께 완치판정을 받았다.


한편, 난 일하고 가사에 간호사일(?)까지 겹치며 면역력 저하로 지금 골골대고 있다. 이제 날 보필할 차례인 남편은 어제 남아공으로 출장을 떠나고... 휴.


어제 문득 남편의 얼굴을 보니 사채 고름에 시달리기 전보다도 얼굴이 환해졌다. 식단 관리에 적절한 산책에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 원흉까지 제거했으니~


"○○아, 나 이번에 진짜 우리가 하나란 걸 느꼈어. 그리고 신이 있는 거 같아. 난 원래 종기 있는 채로 남아공 가려고 했는데, 몇 십 시간 비행기 타다 더 악화됐으면.. 윽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너한테 결국 실토하게 함으로써 수술도 하고, 난 살 운명이었나 봐~
 나 가뿐하게 출장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넌 최고야! 나한테만 맡겨놨음 수술 안 했을 텐데.. 진짜 너무 좋아!"


"그. 그.. 래."


남편은 거의 8년간 달고 산 엉덩이 혹을 떼서 약간 제정신이 아니다. 매우 up 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오버스러운 표현은 이해해 주시길...


나도 남편이 그동안 혼자 끙끙대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어 조금 더 하나(?)가 되었다고는 느끼지만, 앞으로 이런 비밀이 계속되려나? 흠, 역시 결혼생활은 늘 비슷하면서도 새롭다. 방심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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