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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게 늙는 법

by 김콤마

당신은 가성비파인가 아니면 가심비(가격 대 심리적 만족)파인가? 《좋은 물건 고르는 법》(박찬용, 유유, 2023)의 저자 박찬용은 물건을 고를 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충고한다. 단 한 가지 기준으로 물건을 선택하는 것은 그 물건이 가진 입체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흔히 쓰는 펜만 해도 보이는 것과 달리 고도의 공학(만듦새)과 화학(필기 품질) 기술이 반영된 물건이다. 그래서 좋은 선택을 하려면 물건의 여러 가지 면을 골고루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탐색과 고민이 필요하다. 그게 시간 낭비일까? 아니다. 그 경험이 누적돼 나만의 기호가 형성된다. 다른 말로 내 삶의 ‘결’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결이 없는 사람은 무색무취하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멋을 느낄 수 없다.


멋. 저자는 좋은 물건을 오래 쓰면 그 물건이 멋있게 낡는다고 말한다. 내가 주로 앉는 자세를 따라 주름이 지는 청바지처럼. 물건이 낡는다면 사람은 늙는다. 똑같이 늙는 것 같아도 탐색과 고민으로 자기만의 결을 만들어온 사람은 멋있게 늙는다. 젊었을 때는 그저 타인을 모방하는 것으로 멋을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른다. 젊음의 생기가 만드는 후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청춘의 휘황한 빛이 사라졌을 때 나의 기호, 취향이 확고하지 않으면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다. 내가 마흔이 넘어 외모에 느끼는 심사다. 아니,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젊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패션에 기호가 없었다. 그저 대충 저렴한 옷을 사서 입었다. 그런 버릇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그저 편하다는 이유로 무채색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는다. 거울을 보면 그냥 나이 든 아저씨가 서 있다. 이런 나도 과거를 돌아보면 잠깐 멋이 반짝인 시절이 있었다. 서른 즈음에 연애를 하면서 다소 과감한 색상을 시도했다. 그때 나는 붉고 파란 게 좋았고 편한 티셔츠 말고 적당히 뻣뻣한 셔츠와 슬랙스를 좋아했다. 남색 코트에 진한 주황색 바지를 입고 나간 날도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나름의 기호가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멋이 있었다.


현재 내게는 확고한 기호가 있는가? 전자제품 취향은 확실하다. 나는 폰, 태블릿, 컴퓨터, 이어폰 모두 애플 제품을 쓴다. 고급스러운 재질로 군더더기 없이 미니멀하게 디자인한 외관이 좋고, 소프트웨어를 보자면 대부분의 앱이 통일성 있는 UI와 UX를 제공하는 게 좋다. 어떤 앱을 열든 디자인이나 사용법에 이질감이 없다는 의미다.


10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잠시 안드로이드 폰으로 넘어간 적이 있었다. LG에서 출시한 옵티머스 뷰라는 모델로 휴대폰에서 흔히 쓰지 않는 4 대 3 화면비를 채용했고 아이폰과 달리 스타일러스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게 매력이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의무 사용 기간만 채우고 바로 아이폰으로 돌아왔다. 서드파티 앱도 UI와 UX에 일관성이 있고 기본적인 디자인 품질이 보장되는 애플 생태계와 달리 당시 안드로이드는 그저 검은 바탕에 줄 몇 개 그어놓고 글씨를 써놓은 조악한 디자인의 앱이 적지 않았고 앱마다 버튼 모양이나 배치 등이 중구난방이라서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정신 사나운 것보다 정돈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애플 제품, 혹은 그와 비슷한 감성으로 디자인된 물건이 좋다.


그 외에는 딱히 기호가 없다. 기호가 형성되려면 이것저것 많이 접해볼 필요가 있고, 그러려면 이것저것 많이 사봐야 할 텐데 나는 소비에 보수적이다. 뭐든 5만 원이 넘어가면 고민이 많다. 고민 끝에 안 사거나 가성비 위주로 물건을 고른다. 이렇게 고민이 많은 이유는 일단 돈을 많이 쓰는 게 심리적으로 편치 않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완벽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후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물건을 사기 전에 후회를 걱정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직접 써봐야 제품의 장단점을 느끼고 나와의 궁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봐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러잖아도 《좋은 물건 고르는 법》에 완벽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손톱깎이는 양날이 완벽하게 맞물리면 손톱이 잘 깎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터 양날이 살짝 어긋나도록 오차를 두고 만든다. 완벽이 능사는 아니라는 비유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선택에도 약간의 오차를 허용하면 어떨까? 어차피 요즘은 중고거래가 활성화돼 있으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 처분하면 된다. 그 정도 비용은 나의 기호를 찾기 위한 대가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선택이 어려운 사람을 위해 저자는 후디, 신발, 볼펜 등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각 품목에서 초심자가 고려해볼 만한 브랜드와 가격대를 안내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조언하는 것이 아무래도 모르겠으면 ‘근본템’을 사라는 것이다. 근본템이라면 그 분야의 대표 브랜드에서 대표적으로 판매되는 상품을 말한다. 휴대폰으로 치면 애플의 아이폰 일반 모델과 삼성의 갤럭시S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바라는 것도 근본템이다. 근본템을 사는 게 아니라 근본템이 되는 것. 뭔가를 고려할 때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되는 것. 우선은 내 본업인 번역에서 근본템이 되고, 이어서는 출판계의 근본템이 되고 싶다.


번역계에서 근본템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을 많이 해야 한다. 나는 만으로 18년 가까이 일했지만 아직 역서가 60권이 안 된다. 1년에 4권씩만 작업했어도 70권이 넘어야 하는데 한참 모자란다. 요 몇 년간 육아를 이유로 작업량을 줄였기 때문이다. 근본템이 되기 위해서는 인지도가 높아야 하고, 그러자면 베스트셀러가 나와서 많은 편집자와 독자의 눈에 들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역서를 많이 내서 베스트셀러가 나올 확률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작업량을 늘리기 위해 주말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너 시간쯤 카페에 가서 일한다. 1년에 4권을 작업하는 게 목표다.


다음으로 출판계의 근본템이 되려면? 일단 책을 내야 하는데 당장은 나올 책이 없다. 작가로서 그럴싸한 타이틀이 있으면 출간 의뢰를 받을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이를테면 브런치북 공모전 대상 수상자 같은. 그리고 아직은 소재에도 한계가 있다. 지금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이야기는 번역 이야기다. 하지만 번역에 관한 책은 독자가 번역가 지망생, 현직 번역가, 편집자 정도로 한정돼 있다. 많이 팔리려면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니면 황석희 번역가처럼 엄청난 대중적 인지도를 쌓던가. 그가 낸 책 두 권은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황 번역가는 번역계의 근본템이다. 역시 생업에서 근본템이 돼야 커리어를 확장할 길이 열린다. 일단 나도 출판번역계의 근본템이 돼야 한다.


오래전에 친구가 사주를 보러 가는 것을 따라간 자리에서 사주 아주머니가 괜히 내 생년월일시를 묻더니 한 우물만 파라고 조언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지금 하는 일 계속 하라는 말이라고 했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한 우물만 파고 있다. 그때는 번역만 했고 지금은 거기에 더해 내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리고 있지만 넓게 보자면 출판이라는 우물을 계속 파고 있는 것이다. 이놈의 우물은 언제 물이 콸콸 나오려나. 그것을 알려면 계속 파보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물이 잘 나올지 계속 탐색하고 고민하면서. 그러다 보면 편집자와 독자에게 ‘좋은 물건’으로 선택될 날이 오리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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