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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만물리뷰

노트에 50만 원을 써도 될까

슈퍼노트 노마드 한 달 사용기

by 김콤마

50만 원짜리 노트를 샀다. 이름은 슈퍼노트 노마드(Supernote Nomad)라고 한다. 무슨 노트가 50만 원이나? 실제로는 태블릿이다. LCD 대신 전자잉크를 사용해서 눈이 편하고 전력 소모가 적다. 화면에 특수한 필름을 입혀서 일반 태블릿에 비해 글씨를 쓸 때 마찰감이 강하다(이 필기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소프트웨어는 군더더기를 빼고 노트 기능만 넣었다. 그래도 노트에 50만 원을 쓰는 건 과하지 않나? 그나마 중고로 사서 50만 원이지, 신품은 같은 구성에 10만 원을 더 얹어줘야 한다.


종이 노트의 대체재

왜 샀을까? 새로운 기기를 써보고 싶은데 마침 모아둔 용돈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노트에 그 큰 돈을 쓰자니 잘 하는 짓인가 싶어서 챗GPT에게 조언을 구했다. 챗GPT는 일단 한 달간 종이 노트에 글을 써본 후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종이 노트라면 내가 몇 년 전에 잠깐 만년필에 빠졌을 때 사 놓은 게 버리지도 못하고 책장에 잔뜩 꽂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만년필을 대여섯 자루 사고 잉크를 사고 각종 노트를 산다고 또 한 50만 원을 썼다. 하지만 몇 달 만에 종이에 쓰기를 그만둔 이유는 그 비싼 만년필이란 물건의 불편함을 차치하더라도 노트들이 도무지 처치 곤란이었기 때문이다. 다 쓴 노트를 가지고 있자니 쓸데없이 공간을 차지하고 버리자니 거기 쓴 글이 아까웠다. 더욱이 만년필의 수성 잉크는 연필의 흑연이나 볼펜의 유성 잉크와 달리 시간이 지나면 글씨가 희미해지거나 아예 사라진다고 하니 노트를 보관한다고 해서 그 내용이 영원히 존속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바로 슈퍼노트와 같은 전자 노트다. 일반 태블릿 두께의 기계 한 대에 모든 글이 저장되니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고 백업만 잘하면 기껏 쓴 글을 잃어버릴 걱정도 없다. 이거야말로 전자 노트를 사야할 이유가 아닐까? (어디까지나 전자 노트를 사고 싶은 마음이 먼저 생기고 이유는 나중에 찾은 것이지만.) 그러니까 한 달이 뭔가, 종이 노트에 일주일쯤 글을 쓰고는 이쯤하면 전자 노트를 사도 잘 쓰겠다고 스스로 설득을 당했다.



전자 노트 대표 제품 비교

전자 노트를 만드는 대표적 기업은 세 곳이다. 리마커블(Remarkable), 라타(Ratta), 비우즈(Viwoods). 리마커블은 선발주자로 가장 인지도가 높고, 라타는 슈퍼노트를 만들고, 비우즈는 셋 중에서 가장 최근에 시장에 진입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일반 단행본 정도 되는 크기의 제품이었다. 그래서 리마커블 페이퍼 프로 무브(이하 무브), 슈퍼노트 노마드(이하 노마드), AI페이퍼 미니(이하 미니)를 후보로 두고 고민했다. 세 기기를 비교하면 이렇다.


화면 크기

무브: 7.3인치 컬러

노마드: 7.8인치 흑백

미니: 8.2인치 흑백


무게

무브: 230g

노마드: 266g

미니: 230g


한글 필기 인식

무브: X

노마드: O

미니: △ (한 번에 최대 5페이지)


프론트라이트

무브: O

노마드: X

미니: O


타사 앱 설치

무브: X

노마드: △ (복잡함)

미니: O (구글 플레이)


PC/모바일용 노트 열람 앱

무브: O

노마드: O

미니: X


가격(본체+펜+케이스 기준)

무브: 약 72만

노마드: 약 60만

미니: 약 64.5만


셋 중에서 무브는 가격이 비싸서 가장 먼저 제외했다. 남은 것은 노마드와 미니. 두 기기는 각각 차별점이 있다. 노마드는 데이터베이스형 노트를 지향한다. 문서와 문서를 링크할 수 있고 문서에 소제목과 키워드를 넣어 체계적으로 자료를 관리하고 검색할 수 있다. 필기 인식 기능이 강력해서 손으로 쓴 글씨도 검색된다. 필기한 노트를 바로 디지털 텍스트로 전환할 수 있다. 하지만 아마존 킨들 외에는 타사 앱을 설치하기가 (불가능하진 않지만) 매우 번거롭다. 프론트라이트가 없어서 광원이 있는 곳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참고로 프론트라이트는 화면의 뒤쪽에서 사용자 쪽으로 빛을 쏘는 백라이트와 달리 화면의 앞쪽에서 뒤쪽으로 빛을 쏘아서 눈의 피로감을 줄이는 기술로 주로 전자 잉크 기기에서 사용된다.


이에 반해 AI페이퍼 미니는 범용성을 지향한다. 필기 외에도 웹 서핑, 전자책 읽기 등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게 만들어졌다. 구글 플레이를 통해 필요한 앱을 설치하면 된다. 프론트라이트가 있어서 어두운 곳에서도 편하게 쓸 수 있다. 대신 노마드 같은 데이터베이스 기능은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트 검색 시 손으로 쓴 글씨는 검색되지 않는다. 필기를 디지털 텍스트로 전환하는 것도 자체 기능으로는 한 번에 5페이지 정도만 가능하다. 대신 내장된 챗GPT를 이용하면 전체 문서를 변환할 수 있다.


나는 전자 노트를 순전히 노트 용도로만 사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딴짓을 할 수 없는 노마드를 구입하기로 했다. 중고나라와 번개장터에 키워드 알림을 설정해놓고 기다렸다. 금세 입질이 왔다. 본체, 기본 펜, 가죽 케이스 구성으로 50만 원(신품으로 사려면 약 63만 원). 누가 채갈세라 곧바로 결제했다. 주말을 거쳐 사흘 만에 받은 슈퍼노트 노마드의 첫 인상은,


“아, 망했다, 슈퍼망했다!”



첫인상은, 망했다

많은 이가 찬사를 아끼지 않던 필기감이 문제였다. 일반 태블릿 표면이 글씨를 쓸 때 미끄럽다면 노마드는 뻑뻑했다. 고무 위에 글씨를 쓰는 것처럼 화면이 펜촉을 붙드는 느낌이었다. 프론트라이트의 부재도 아쉬웠다. 없어도 충분히 밝다는 리뷰를 많이 봤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화면이 갱지 색깔이라 검은색 글씨를 쓰면 대비가 약해서 칙칙해 보였다. 책상 스탠드를 켜면 그제야 겨우 스탠드를 안 켰을 때 일반 종이에 쓰는 수준의 대비가 나왔다.


그리고 판매자님, 케이스 깨끗하댔잖아요? 더럽지는 않지만 새하얀 가죽이다 보니 사용감이 느껴졌다. 중고품을 구매할 때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긴 하다. 사람마다 ‘깨끗함’, ‘양호함’의 기준이 다르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필기감이 실망을 넘어 충격적이라 뜯은 지 30분 만에 중고나라에 내놨다. 그런데 내가 상품 등록 알림을 받고 5분 만에 구매한 것과 달리 하루가 지나도록 물건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찾는 사람만 찾는 마이너한 제품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 방구석에 방치된 상자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어디 바깥에 내놨어야 했다. 괜히 옆에 있으니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어져서 판매 글을 내렸다.


다시 써봐도 여전히 필기감이 불편하다. 국내에는 사용자가 많지 않아서 레딧(Reddit)에서 검색해본다. 원래 이렇게 고무 위에 쓰는 느낌인가요? 예, 처음에는 그래요. 그런데 계속 쓰다 보면 나아져요. 몇 시간 쓰면 특유의 손맛에 빠질 걸요? 에이, 몇 시간 쓴다고 뭐가 달라지…



슈퍼노트 노마드의 장점

어라, 이게 달라지네? 불편함을 참으며 4,000자쯤 썼더니 비로소 그 손맛이란 게 느껴졌다. 불쾌한 저항감은 사라지고 조금 거친 종이 위에 볼펜으로 쓰는 것 같은 필기감. 아이패드에 종이 질감 필름을 붙였을 때 느껴지는 인위적인 마찰감과는 또 달랐다. 아이패드에 쓸 때처럼 ‘딱딱’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도 않았다. 애플펜슬의 뭉툭한 펜촉과 달리 0.5mm 정도 되는 펜촉도 세필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잘 맞았다.


일반 종이 노트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느낀 장점은 태블릿 거치대에 올려놓고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종히 노트는 책상에 놓고 쓰면 고개를 많이 숙일 수밖에 없다. 장시간 그 자세를 유지하면 목에 무리가 간다. 그렇다고 독서대나 태블릿 거치대에 비스듬히 세워놓으면 종이가 들떠서 불편하다. 하지만 노마드는 태블릿이라서 그런 문제가 없다. 높이 조절이 가능한 태블릿 거치대에 놓고 쓰면 목을 심하게 구부릴 필요가 없어서 종이 노트에 쓸 때보다 건강에 좋은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노마드 덕분에 손으로 글을 쓰는 재미를 다시 느꼈다. 내친 김에 일주일 동안 약 4만 자 분량의 글을 써서 제13회 브런치북 공모전에 응모할 수 있었다. 공모전 결과의 상관없이 그 정도 창작욕을 불러일으킨 것만으로 10만 원 치 값어치는 했다고 생각한다(10만 원이라는 계산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주관적 만족감뿐이지만 어차피 주관적 경험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니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슈퍼노트 노마드의 단점

하지만 계속 보유할지는 고민이다. 화면의 질감, 아니, 촉감 때문이다. 필기감을 살리기 위한 필름 때문인지 화면이 손에 달라붙는 느낌이다. 만져보면 점성은 없지만 글씨를 쓰고 있으면 마치 손에 로션을 바르고 종이에 글씨를 쓰면 종이가 손에 약하게 달라붙는 것처럼 화면과 손 사이에 미세한 접착력이 생긴다. 손을 옮길 때마다 고무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뻑뻑’ 소리가 난다. 종이에 쓸 때처럼 손이 저항 없이 싹싹 미끄러지지 않는다. 레딧을 보면 이런 느낌이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영 적응이 안 된다.


또 나를 고민하게 하는 이유는 ‘고급감’의 부재다. 노마드는 재질이 플라스틱이다. 흰색 플라스틱. 그래서 본체 가격만 약 45만 원인 기기가 장난감처럼 보인다. 차라리 검은색이었으면 나았을 것 같다. 이번에 확실히 알았는데 나는 쇳덩이가 좋다. 전자제품은 메탈 재질이어야 고급스러워 보인다. 리마커블 무브와 AI페이퍼 미니는 메탈이다. 그러니까 못내 미련이 남는다.


노마드의 장점이라 생각했던 필기 변환 기능과 데이터베이스 기능은 막상 써보니 필요가 없었다. 노마드에서 필기 문서를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하는 것보다 그 문서를 컴퓨터로 받아서(슈퍼노트 파트너라는 앱을 통해 쉽게 공유할 수 있다) 다른 앱으로 변환하는 게 시간도 절약되고 정확도도 높다. 그리고 내가 노마드에 쓰는 글은 어디까지나 초고일뿐이다. 이후 컴퓨터로 퇴고해서 완성본을 업노트나 데이원에 저장한다. 그 앱들이 나의 데이터베이스다. 그러니까 노마드의 데이터베이스 기능은 내게 무의미하다.


이런 이유로 AI페이퍼 미니와 리마커블 무브가 다시 후보군으로 떠올랐다. 그러고서 여러 편의 리뷰 글과 영상을 찾아보고 내린 결론은, 각 제품의 필기감과 사용성은 아무리 리뷰를 봐도 알 수 없으니 직접 써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 다행히 공식 사이트에서 구매할 경우 AI페이퍼는 100일, 리마커블은 50일 내에 반품이 가능하다. 그래서 일단 AI페이퍼 미니를 주문했다. 아무래도 리마커블 무브 역시 조만간 주문할 것 같다.


슈퍼노트 노마드를 사고 알게 된 것. 1) 손으로 글을 쓰면 재미있다. 2) 나는 기왕에 큰돈을 쓸 거면 고급스러운 물건에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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