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만물리뷰

열흘 밤 나를 깎아봤다

제13회 브런치북 공모전 응모 후기

by 김콤마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다. 나한텐 뾰족한 게 없으니까. 그런데 잠깐, 뾰족한 거 만들 수 있겠는데?


제13회 브런치북 공모전 이야기다. 뾰족하다는 말은 주제가 두루뭉술하지 않고 명확하게 초점이 잡혔다는 의미로, 2년 전 이야기장수의 이연실 대표가 웹진 폴인의 세미나에서 브런치북 공모전 심사자로서 조언하며 사용한 표현이다. 뾰족하게 써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그냥 직장인 에세이가 아니라 지하철 기관사 에세이, 거기서 더 초점을 예리하게 깎아서 지하철 현장에서 겪는 희로애락을 주제로 잡는 것이다. 그해 브런치북 공모전에서 이야기장수가 선정한 <마리오네트 지하철>이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그때 기록을 찾아보니 이 대표는 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집중하라는 말도 했다. 같은 의미다.


나는 이번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이 없다고 생각했다. 올해는 만화만 그렸지 글은 뒷전이었다. 만화 밑에 붙이는 글 몇백 자 대충 쓰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공모전 마감일을 열흘 앞두고 그 만화들이 뾰족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가의 삶을 만화로 그리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나밖에 없다. 그 짧고 허술한 만화만으로는 책을 만들 수 없겠지만(브런치북 공모전은 책이 될 만한 콘텐츠를 선정하는 대회) 만화에서 못 다 한 번역 현장의 이야기를 자세한 글로 더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만화 1편당 약 4,000자 분량의 에세이를 붙이기로 했다. 그 정도면 책에 들어가는 챕터 하나의 분량으로 적당했다. 마침 그 정도 길이로 써놓은 글이 1편 있어서 게시물 최소 10개라는 응모 조건에 맞추려면 9편이 더 필요했다. 하루에 1편씩 완성하면 됐다. 일정이 촉박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날부터 바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과 육아를 마친 후 밤늦게 썼지만 그래서는 도저히 마감에 맞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틀은 본업을 미루고 종일 글을 썼고 또 하루는 멀리 대구에 사진 전시회를 보러 간 길에 그곳의 카페에서 오후 내내 썼다. 강행군이라면 강행군이었다. 그 덕에 마감일 하루 전에 10편을 완성하고 출품할 수 있었다.


10편은 응모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지, 그 정도 분량으로 심사자에게 나를 뽑아야 한다는 확신을 주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완결된 브런치북이 아니라 연재 브런치북 형태로 출품했다. 브런치 측의 설명에 따르면 심사 시점에 따라 심사자가 마감일 이후에 해당 브런치북에 게시된 글을 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출품 후 일주일에 1편씩 올린다면 심사자에게 총 13~4편 정도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열흘 만에 약 4만 자 분량을 완성한 것은 루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글을 썼다.


1. 새 글(A)을 쓰기 위한 마인드맵 그리기 (소재 발굴)
2. 1을 토대로 A의 개요 작성하기
3. 2를 토대로 A의 초고(A1) 쓰기
4. 기존에 쓴 글(B)의 2고(B2) 퇴고하기 → B3 완성
5. Al 퇴고하기 → A2 도출
6. B3 게시
7. 1로 돌아간다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하다. 먼저 마인드맵을 그리고 개요를 작성한 후 거기에 맞춰 초고 → 2고 → 3고 순으로 쓰면서 틈틈이 이전에 쓴 글을 퇴고했다. 이렇게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은 것처럼 착착 원고를 처리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납기일을 맞출 수 있었다.


위의 루틴에서 내게 새로운 부분은 개요 작성(②)이었다. 평소 나는 개요 없이 바로 초고를 썼다. 미리 틀을 잡아놓으면 글이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없어서 창의력에 제동이 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자유를 만끽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갈 길을 정해놓고 시작했다. 내리 9편을 쓰고 보니 개요를 작성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예전에는 초고를 거의 뜯어고치다시피 다시 쓸 때가 많았다. 글의 흐름을 정돈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개요를 의식하고 쓴 글은 그런 대공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정돈과 공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에는 초고를 손으로 쓴 덕분에 처음부터 더 가지런한 글을 쓸 수 있었다. 원래 나는 폰이나 컴퓨터로 빠르게 초고를 써내려 간다. 초고를 쓸 때 편집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 대로 써야 더 창의적인 글을 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은 이번에 손으로 초고를 쓸 때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펜은 터치나 키보드보다 느리다.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종이에 기록될 때까지 더 긴 시차가 생긴다. 그것이 비록 찰나라 해도 생각이 스스로 정리될 틈이 됐다. 글씨 쓰는 속도를 따라가야 하니까 생각이 너무 날뛰지 않았다. 그래서 공사할 부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열흘이란 기한이 정해져 있으니까 무한정 시간을 쓸 수 없어서 퇴고 때 최소한의 수정만 가한 것도 이전에 비해 공사 규모가 줄어든 이유가 될 것 같다.


다 끝내고서 생각해보면 근 20년간 이렇게 글쓰기가 재미있었던 적이 없었다. 특히 이틀은 종일 글을 썼는데도 지겹지 않았던 게 인상적이다. 이 정도면 글쓰기로 먹고사는 것도 해볼 만하겠다 싶다(성공할 수 있겠다는 말이 아니라 시도는 해볼 수 있겠다는 의미로). 물론 짧게 경험했을 뿐이니 같은 방식으로 더 오래 글을 쓴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글쓰기가 유독 재미있었던 이유는 말했다시피 퇴고에 긴 시간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초고만 써놓고 차일피일 퇴고를 미루기 일쑤였다. 어수선한 원고를 리라이팅 수준으로 정리할 생각을 하면 이미 질려서 다시 볼 엄두가 안 났다. 하지만 이번엔 퇴고 때 그 정도로 고생할 필요가 없어서, 또 그럴 만한 여유도 없어서 비교적 빠르게 글을 완성했다. 평균을 내보면 하루에 1편씩 완성했다. 그 속도감이 좋고 매일 뭔가 뚝딱 만들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앉아서 쓰느라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퀘스트를 완수하는 게이머처럼 즐거웠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렇게 쓸 생각이다. 그러니까 개요를 작성하고, 손으로 쓰고, 퇴고는 신속하게. 이것이 제13회 브런치북 공모전에 응모하고서 거둔 가장 큰 수확이다.


참, 그리고 뾰족하게 쓰기. 언제나 명심할 것.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현상의 절반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