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기를 손에 쥔 여덟 살의 나
여덟 살 무렵,
더 어린 나이에 이혼하셔서 몇 년간 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오셨다.
오랜만에 나를 만나신 아버지는 별 말이 없으셨지만,
어머니와 사전 교류가 있으셨는지,
어색했던 나를 데리고 바로 세운상가로 가셨다.
대구에서 올라오셔서 서울이 익숙하지 않으셨던,
그리고 썩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지금 기억에 아주 비싼 돈을 주고 게임기를 사서 나에게 선물해주셨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버스 정류장을 보면 왜 그런 곳이 있다.
사람들이 별로 타지도 않고, 내리지도 않아서
운전기사님이 거의 정차하시지 않고 지나가는 그런 곳.
나는 아버지와 돌아오는 길에 그 정류장이 조금 헷갈려서
내려야 될 곳 보다 한 코스 먼저 벨을 눌러버렸다.
무심한 버스 문은 당황하는 나와는 상관없이 열려버렸고,
내릴 곳이 아니었던 나는 아버지를 붙잡고
이곳이 아니라고 내리지 말자고 했다.
그때, 거울을 통해 나를 빤히 바라보던 운전기사님께서
엄청 화난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셨다.
“야! 왜 내리지도 않으면서 벨을 눌러! 엉?! 짜증 나게.."
그 시절 운전기사님들은
뭐 그리 화가 많으시고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우리 외에는 손님도 없는 빈 버스 안에서
애매하게 손잡이를 붙잡고 서있던 나에게
그렇게 소리를 치셨다.
가뜩이나 숫기가 없던 나는 너무 무섭고 창피해서
얼어붙어버렸다.
그런데 그때, 게임기를 사서 돌아오는 내내 별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아니, 우리 아들이 잠깐 헷갈려서 그러는데 그까꼬 왜 그러세요?!
우리 아들이 그러는데! 우리 아들이!”
라고 대응하듯이 소리를 치셨다.
나도 모르게 운전기사님에 대한 무서움이
어느 정도 상쇄되는 기분이 들었고 뭔가 모를 든든함도 느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울타리를 느꼈던 순간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부터 정확히 33년 전 일이지만,
그때의 공기, 그때의 기분, 그때의 주변이 모두 기억나고 생생하다.
아무튼 그러고 나서 어색하게 아버지와 밥을 먹고 다시 헤어졌고,
그 이후로는 별로 왕래가 없이 지금껏 살아왔다.
그때의 기억은 잠시 잊혔고,
그동안 아버지와도 연락을 하지 못했던 나는,
아버지의 부재로 내가 상처를 입었는지, 결핍이 있었는지,
아니면 힘들었는지 조차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누나와 나를 혼자된 몸으로 키워오신 어머니에게
효도를 해야 된다고만 생각하고 살았고,
두 아들의 아빠가 된 지금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요즘 가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우리 아들~!”
이제는 내 삶의 전부가 돼버린 두 아들들을 부를 때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호칭인데도 불구하고,
그 ‘우리 아들’이라는 4음절을 말하고, 그 말이 다시 내 귀로 들릴 때면
33년 전 버스 안에서의 그 울림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자주 든다.
그리고 가끔은 눈물이 난다.
너무나 원망스러웠고, 너무나 아득했던 아버지의 존재를
여덟 살의 나는 계속해서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