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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Oct 05. 2023

삭막하지 않은, 어쩌면 제일 아름다운 곳

안녕하세요 저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1.

응급실에 있었다. 초보 간호사 시절.

학생 때 생각했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바쁘고 분주한 공간에서 일하게 됨이 설레기도 했지만 설렘은 그저 설렘으로만 끝나버린다고 했다.


/

내가 응급실에서 일하던 시간 동안 나는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감히 들여다보곤 했었다. 어느 해 12월 25일, 유난히도 세상이 하얗던 그날. 난 복숭아뼈까지 쌓인 눈을 지끈지끈 밟으며 여느 때처럼 내가 일하는 대학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 나는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달력에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는 날은 응급실이 포화 상태가 되는 날이다. 모두가 행복한 하루를 맞이하는 크리스마스가 응급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어쩌면 곤욕의 날인 셈이다. 출근하자마자 역시나 응급실은 환자로 붐볐고, 인계를 할 새도 없이 나는 바로 인력에 투입되었다.


한 할아버지 환자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이 힘들어하셨지만, 응급실에는 더 이상 남아있는 bed가 없었다. 다행히 하나 남아 있는 응급구역에 할아버지를 눕혔지만 일단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에겐 아무 처치도 해 드릴 수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우선이었을 할아버지에게 그나마 해 드렸던 일은 Saturation(산소포화도)을 손가락에 연결해 드리는 일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점점 힘들어 하셨지만 우리는 너무도 바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직 할아버지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환자에게 간호처치를 하고 난 후 처방을 보기 위해 컴퓨터 자리에 앉으려 하던 찰나, 응급구역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가 이상하다는 것을 난 본능적으로 자각했다. 1년 차 초보 간호사가 이상함을 감지한 건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산소포화도 농도는 쉴 새 없이 바닥으로 치닿기 시작했다. 나는 할아버지 상태가 비정상적이라고 응급실이 떠나가게 소리를 질렀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심폐소생술 준비를 했고, 일하는 사람 모두 할아버지를 위해 달려왔다.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고 할아버지는 다행히 소생하셨다.

병원으로 전원을 가셔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우리병원에서 해 드릴 수 있는 모든 의료 처치는 해

드린 후 전원 갈 병원을 찾고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다른 병원으로 무사히 전원을 가셨고, 그 이후로 나는 당연히 할아버지가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알지 못한다.

겁에 질린 어린 손자는 "떡을 먹다 할아버지가 체한 줄로만 알았어요." 하며 할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생으로 기울어지셨고, 어쩌면 다시 소생한 생은 꼭 할아버지에겐 다시는 바꿀 수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때 내가 할아버지가 보이는 응급구역 근처에 앉지 않았다면...하는 생각은 아직도 나를 아찔하게 만든다.


지금 나는 응급실이 아닌 다른 파트 간호사가 되어 있지만, 가로등이 켜지고 해가 기울어지는 모두가 퇴근하는 늦은 밤. 몇 대의 119차가 즐비하게 서 있는 응급실을 지나칠 때면 아직도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투박한 글씨로 빨간 바탕의 응급구역센터라고 칠해져 있는 간판은 어쩌면 그리 삭막하지만은 않은, 어쩌면 누군가에겐 제일 아름다운 곳일지도 모른다.






2.

20살 때 다른 학과 공부를 하던 중 10대 시절부터 갈망하던 간호학을 전공하고 싶어 다니던 학과를 그만두고 간호학과에 재입학했다. 1,000시간이 넘는 실습 시간, 온전히 쉬는 방학도 없이 4년을 보낸 후 졸업과 동시에 시행하는 간호사 국가고시에 한 번 낙방했다. 그렇게 좌절로 1년을 보낸 후 간호사에 대한 열망이 잠시 사그라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훗 날 시험에 통과 후 면허증을 받고 나니 나름대로 간호사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하지만 처음으로 취업한 어느 대학병원 응급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차가운 공기와 버팀으로 채워질 공간이 사실 호감이 가지도 않았다. 심폐소생술을 하는 공간인 응급구역과 네모진 각으로 잡혀 트리아제로 구분된 공간은 병원에 대해 익숙하지 못한 나에게 꽤나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잘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원하던 간호사가 되었으니 충분히 해내리라 믿었지만 프리셉터 선배 간호사로부터 독립한 첫날, 그 믿음은 처참히 무너져 버렸다. 아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첫날부터 꽤 중증의 상태로 119에 실려 온 응급 환자. Semicoma(통증 자극에 대한 도피운동이나 다소라도 순응성의 움직임을 나타내며, 또한 자극이나 흔들어 움직이게 함으로서 같은 반응을 나타낸다. 부르는 데 대해서 신음소리 등을 낸다. 반사는 유지되나 통상은 실금상태이다. 출처: 간호학 대사전) 상태로 도착한 환자는 동공도 풀려있고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의 hepatic coma (간성혼수) 환자였다. 얼음장마냥 얼어 버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환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 심장 뛰는 소리만 귓가에 어렴풋이 들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난 그저 환자를 보고 가만히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바이탈 사인 체크 안 하고 뭐해? 얼른 환자 옷 갈아입히고, 라인 달 준비해. 환자 넘어가게 둘거야?”

몇 발자국 근처에 서 계시던 선생님은 얼른 내가 무슨 처치라도 해주길 바라셨다. 얼른 정신을 차렸다. 환자를 위해 무언가라도 해야만 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18G vinca(정맥용 주사바늘침중 제일 두꺼운 바늘)를 들고 환자의 정맥을 여러번 찔러댔다. 능숙하지 못한 나는 몇 번이나 실패를 했고 보다 못한 고년차 선생님의 도움으로 환자에게 수액을 주입하고 채혈을 할 수 있었다. 환자는 바이탈 사인도 자꾸만 흔들렸고, 중환자실로 올라가야 할 상태가 되었다. 중환자실에 올라가기 전까지 응급실에서 행해야 했던 수많은 검사들을 내가 어떻게 수행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만큼 혼란스러웠던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었다.


환자를 무사히 중환자실로 보내고, 어느 때보다 긴 새벽을 보낸 후 아침에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고 아무도 없는 탈의실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내가 생각했던 간호사는 이게 아닌데. 엄청난 괴리감과 함께 떨어지는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투명파일 속 빳빳하게 꽂혀 있는 간호사 면허증이 ‘넌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라며 비웃듯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물론 독립 후 처음으로 Acting일을 했으니 어려움이 따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몸은 힘들고 피곤했지만 직접적으로 환자에게는 큰 도움을 준 것이 없는 길고도 긴 새벽이었다.

"너 이제 졸업했어. 더 이상 학생 아니야.”

고년차 선생님의 목소리가 계속 귀에서 웅성거리는 듯 했다. 응급한 환자가 왔으니 호통치며 혼내야 했던 일은 선배 간호사의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해해야 했다. 나는 스스로가 정신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막 사회생활에 디딘 발자국이 아가의 발자국처럼 한 없이 작아보였다.


/

몇 주 정도가 지나고 간성혼수 환자 보호자를 다시 만났다. 외래에 진료를 보러 왔다고 했다. 환자는 반 혼수 상태였기 때문에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보호자는 나를 알아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리고

"고마웠어요."

라며 나를 다독였다.

환자에게 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지나간 기나긴 새벽녘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나에게 감사하다고 해 주는 보호자의 말이 마치 마음의 마름을 적시는 개운하고도 예쁘게 내리는 빗소리처럼 들렸다.


'잘 버텨주고 잘 지내줘서 나도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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