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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지하 Feb 27. 2022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를 꼬박 교실에서 보내야 했던 고3 시절. 아직도 기억나는 자습실 내 자리. 불행 중 다행은 랜덤으로 배정된 내 자리가 창가였다는 것뿐이었다. 창밖으로 체육관 지붕과 높은 담이 보이는 자리.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하는 교실이 감옥같이 느껴지던 그 시절에 오로지 즐거움은 작은 MP3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담아 듣는 것뿐이었다. 지루하기만 한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노래를 들으며 한참 공부를 하다 우연히 창밖을 내다봤는데, 체육관 지붕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볕을 쬐며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저 높은 곳엔 어떻게 올라간 거지 대체-,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는데 귀에서 들려오는 노래 가사가 내 마음에 깊게 꽂히고야 말았다.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그 무엇도 내 세상을 바꿀 수 없어요



재즈 보컬리스트 Fiona Apple의 "Across the Universe"라는 곡이었다. 비틀즈의 원곡을 커버한 곡이란 건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알게 된 지금도 여전히 이 커버 버전이 훨씬 내 취향이다.)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목소리, 나른하게 읊조리지만 단호하게, 또 담담하게 말하는 가사. 깊이 가라앉는 것 같으면서도 둥둥 떠다니며 표류하는 것 같은 오묘한 느낌. 그 노래가 순간 마치 bgm처럼 깔리며 무료하고 허무했던 내 일상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지루하기 짝이 없던 그 시절이, 내 인생에 가장 안온하고 평온한 시간일 거란 걸. 더 큰 세상 밖으로 나서면 학교에서 느끼는 어려움, 힘듦, 막막함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그 일요일 낮의 평온한 풍경. 나는 그 풍경을 사랑했다. 오래 지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취향과 개성이 다른 이들을 왜 굳이 한 공간에 몰아넣고 규칙과 규율에 맞춰 감옥처럼 지내게 할까, 학교라는 공간에서 대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 시절엔 온통 의문문뿐이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학교는 내가 속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울타리였을 지도 모른다는 걸. 우리가 그 속에서 배워야 했던 건 어떻게 하면 우수한 학생이 되어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에 가느냐가 아니라, 졸업 후 필연적으로 겪게 될 막막하고 벅찰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적어도 두 다리 버티고 서있을 수 있는 힘을 키우는 방법이었다는 걸. 이 노래의 가사처럼 선인의 깨달음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적어도 내 힘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그런 방법들. 그 무엇도 내 세상을 바꿀 수 없도록 말이다. 


느리고, 무료하기만 하고, 따분하기만 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던 10대의 그 시간들이. 그 시간을 버티기 위해 나는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정말 살아야 하는 건지... 어른들은 쓸데없다고 말하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중요했던 그 의문문들이 가득했던 시간들이, 그 시간들을 버티던 그 힘이, 어쩌면 지금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건 아닐까. 세상이 아무리 무너지고 부서져도 변하지 않는 내 안의 무언가, 그런 걸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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