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연재
사실 내가 혼자 사는 것 자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략 만 열아홉을 기점으로 유학, 취직, 이직 등 다양한 이유로 부모님 그리고 4살 터울의 언니와 쭉 그리고 뚝 떨어져 지냈으니까. 그 도착지마저 매번 달라서 언제는 스위스, 언제는 영국, 또 언제는 한국이었고 내가 스위스에 있으면 언니는 한국에, 내가 한국에 있으면 언니는 홍콩에, 그리고 부모님 두 분은 코로*가 장기화 되기 직전까지도 쭉 중국에 거주하셨으니 십대 후반 이후로 네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산 날은 거의 손에 꼽는 셈이다.
덕분에 꽤 오랜 기간 나의 짐은 비행기 무료수하물 허용량에 추가금 붙인 32kg의 커다란 빨간색 이민 캐리어 1개와 기내용 여행 캐리어 1개가 전부였다. 그러다 이십대 중반에 웹툰PD가 되겠다는 일념 하에 한국에 귀국한 뒤에는 외국에 계신 부모님 대신 집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부모님의 집에 살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안에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의 국내-해외 생활이 뒤섞인 부모님의 짐, 언니의 짐과 내 짐이 모두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게는 쓸모 없어 보이는 물건이라 버렸더니 몇 달 뒤 돌아온 언니가 그 물건을 찾는다던가, 쓸데없이 부피만 차지하는데 부모님의 추억이 어린 물건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 집에 살지 않는 사람들의 물건이 정작 그 집에 사는 내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그래서 이번에 독립을 하면서 다짐 했더랬다. 이번 집에는 내 취향에 꼭 맞는 물건만 들이자고-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또 다시 다루기로 한다.)
하여간 그렇게 몇 년간 부모님의 집에서 자취 아닌 자취를 하며 직업이 웹툰PD에서 웹툰작가, 에세이작가로 바뀌는 사이 처음으로 내 발품을 팔아 집을 보러 다니고 내 명의로 한 첫 계약이 바로 이전 글에도 언급한 작업실이었다.
아니, 부모님 집에 그냥 눌러 붙어있지 왜 굳이 작업실을 구했냐고 묻는다면, 결국 또 코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게 된다.
2019년 말,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역병이 돌기 직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부모님을 뵈러 두 분이 계신 중국 시안(서안)에 갔다 엄마와 함께 한국으로 귀국을 했더랬다. 엄마는 지병 때문에 그전에도 1년에 한번씩 한국에 와서 처방약을 받아가셨는데, 이 참에 조금 느긋하게 있다 출국 하시겠다던 엄마의 계획은 새해가 밝음과 동시에 전해진 심상치 않은 뉴스들로 인해 잠정 중단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가 이렇게 오래 한국에 있게 될 줄은.
그리고 아빠를 1년이나 못 보게 될 줄은.
사실 그 전에도 6개월에서 1년 정도 아빠를 못 보는 건 우리 집에서는 제법(?) 예삿일이었다. 아빠가 한국에 출장을 오시거나, 내가 중국에 여행을 가거나 할 때 틈틈이 얼굴을 보는 사이였다고 할까. 하지만 보지 ‘않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영겁의 강이 있다. 전자는 선택하는 것이고, 후자는 선택의 기회조차 없는 것이니까.
다음 달이면 괜찮아지겠지, 석 달 후면 괜찮아지겠지, 내년이면 괜찮아지겠지… 그 사이 엄마의 비자가 만료 되었고, 한국 뉴스에서는 코로*의 위험성에 대해 종일 떠들었으며, 중국 내에서는 아파트 단지 단위로 락다운이 걸리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해 들으면서 우리 가족은 온통 불안에 떨었다. 그 당시의 누구나 그랬겠지만, 혼자 있는 아빠가 걱정 되어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마스크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당시 중국 세관에 걸리면 압수당한다는 말에 언니가 어렵게 구한 KF-94 공업용 분진 마스크를 문익점의 목화씨앗마냥 짐에 숨겨 아빠에게 전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잃어버린 2020년”이 순식간에 지나고 코로*가 본격적으로 장기화 되면서 아빠는 오랜 고민 끝에 중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귀국하기로 결정하셨다. 무엇보다 다음 해 봄 언니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 집 상황은 양반이었다. 실제로 코로*가 이 정도로 장기화 될 줄 몰랐던 때, 아빠의 몇 지인들은 잠시 피해있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에서의 생활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귀국했다가 중국에 재입국하지 못해 울며 겨자먹기로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와야하기도 했다.)
하여간 아빠의 귀국을 앞둔 며칠간 질병관리청 홈페이지와 외교부 사이트를 열심히 들락날락하고 네이버 블로그 후기글을 열심히 뒤진 끝에 우리 가족은 첩보물을 방불케 하는 2주 가량의 자택 격리 플랜을 짜기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해외 입국자 전용 호텔 또는 에어비앤비를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한국에 거주지가 있는 경우 자택 격리가 원칙이었고, 혹시라도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병원과 보건소가 가깝고 익숙한 집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계획을 잡았는데, 아뿔싸. 나는 내 방이 있었지만 엄마는 안방에서 자는 상황이라 아빠가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 집에는 화장실이 하나고 환기가 잘 안 되는 집 안쪽에 위치했다. 엄마도 거의 모든 생활을 집에서 하고 나 역시 재택 근무자인 상황에서 보건소에서 안내 해준대로 아빠가 화장실을 쓸 때마다 소독하고 환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도 2주나!
결국 특단의 조치로, 엄마와 내가 집 근처의 호텔에 묵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덕분에 엄마와 나는 때아닌 호캉스를 떠나게 된다. (여담이지만, 내가 매년 사주를 보러 가는 사주카페에서 그 해 12월에 여행 운이 있다고 했는데 역병이 창궐한 마당에 무슨 여행이냐 코웃음을 쳤건만 정말로 집을 떠나기는 했으니 참, 용하기는 용한 집이다.)
하여간 아빠 혼자 집에 계셨던 2주 내내 아빠는 집안 이곳 저곳을 탐방(?)했는데, 내 방에 들어간 아빠는 그 동안 어떻게 이렇게 답답한 곳에서 잠을 자고 일을 했냐며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내 방은 웬만한 고시원보다 작은 사이즈라 공간의 효율성을 최대로 높이기 위해 이층침대(벙커/로프트 침대) 아래를 사무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의 여느 집이 그렇듯 북유럽 브랜드(a.k.a. 이케아)의 이층침대를 담기에는 우리 집 천장이 너무 낮았다는 것이다. 다리를 20센티 넘게 잘라 억지로 설치를 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막상 올라가면 여유공간이 세 뼘이 될까 말까 했다. 당연히 허리를 세우고 앉을 수도 없었고 천장에 머리를 박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지금에 와서야 윗집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남겨본다…) 하여간 거기 누우면 천장이 바로 눈앞에 있어 관짝에 들어간다면 이런 기분일까 상상하곤 했는데, 그렇다고 침대 아래 공간은 쾌적했냐고 묻는다면… 분명 아늑하긴 했지만 쾌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린 다리만큼 낮아진 공간 안에는 책상과 의자 하나가 겨우 들어갔는데 하필 내가 또 앉은 키가 큰 편이라 기지개는커녕 일어날 때마다 원목 프레임에 정수리를 꽝꽝 부딪히기 일쑤였다.
아빠의 격리가 끝나고 엄마와 내가 집으로 돌아온 뒤, 매일 문어처럼 사다리를 흐느적흐느적 기어 내려와 의자에 앉으면 출근, 밥 먹을 때와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면 퀸 사이즈의 거대한 침대를 머리에 이고 만화 원고나 글 원고를 작업하는 나를 보며 아빠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작업실을 하나 구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신 것이다.
아, 미리 말하는데 보증금은 안 보태주셨다. 우쒸 아빠 결자해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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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일주일간 다방과 직방으로 시세를 확인하고 집 근처 부동산 두 세곳을 빙빙 돌고돌아 원룸 한 곳을 골라 계약했다. 꽤 오래된 빌라였는데, 얼마나 오래 되었냐 하면 기본 옵션인 냉장고가 무려 LG의 옛 이름인 ‘금성’ 냉장고였다. 그만큼 오래되셨다는 거지…. 체리색 몰딩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주제에 보증금도 주변 시세에 비해 비쌌고 월세도 생각했던 예산보다 5만원이 비쌌는데, 그럼에도 며칠간 본 중에 가장 넓고, 채광이 밝고 천장이 높은 곳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가진 예산으로는 이게 최선이라는 것이 착잡하기도 하고, 그래서 약간은 떨떠름한 마음으로 계약금을 보내면서도 그래도 계속 생활할 곳은 아니니까…라고 되뇌이며 마음의 위로를 삼기도 했다.
(참 다시 생각해봐도 원룸 장사하는 인간들 진짜 양심 없다.)
하여간 그 후 2주 동안 폭풍의 시간을 보냈다. 이삿짐 센터를 어플로 찾아 겨우 예약하고, 이사 전날까지 짐 싸기는커녕 외주를 마치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상태로 비몽사몽… 그렇게 이삿날 아침이 밝았다.
생각보다 더 아침 일찍 찾아오신 이삿짐 센터 사장님께서는 벙커침대 사이로 책상과 의자를 빼내는 묘기와 더불어 수 백 권의 책을 순식간에 짐차에 싣는 마법을 보여주셨다. 이삿짐 차가 먼저 출발하고, 가서 봐주겠다고 하시던 부모님도 출발하고, 나는 미리 싸뒀어야 마땅할 자잘한 짐을 마구잡이로 계약서와 함께 던져넣고 뒤뚱뒤뚱 걸어 도착을 했는데…. 여기서 내가 간과한 게 하나 있다면, 전 세입자가 본인이 사서 설치한 도어락을 내게 팔고 가면서 비밀번호를 남겨줬는데 내가 그걸 중개인에게 전달 받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나머지 보증금을 입금해야 이삿짐을 올릴 수 있는데, 명백한 내 실수였다. 그리고 부모님은 당연히 내가 중개인에게 받은 줄 알고 이삿짐 센터 사장님에게 문을 열어주셨고.
부동산은 빌라 바로 아랫골목에 위치해있었기에 이삿짐이 올라가는 것을 본 중개인 아저씨와 집주인이 씨근덕대며 집으로 올라왔다. 그제서야 집주인이 살짝 다혈질이라고 중개인이 귀뜸해줬던 것이 기억났다. 집주인은 이게 뭐하는 짓이냐, 도어락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중개인도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까딱 잘못하면 주거침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또 그 와중에, 대충 덧칠만 된 한쪽의 벽지만 보였다. 윗층인 옥탑에서 물이 세서 붉은 자국이 남은 벽 한쪽에 도배를 새로 해주기로 계약서에 적었는데, 그날 와서 보니 그냥 대충 덮은 것 같은 자국이 여실했다. 저것도 말해야 하는데. 근데 또 내가 잘못한 상황이고, 사다리차는 와있고, 이삿짐 센터 사장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고, 집주인은 짐 빼라고 고함을 지르고… 수 쌍의 눈동자들이 내게 와 박혔다. 나는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서 어버버.
그런데 그 순간 아빠가 내 앞으로 슥 나서더니, 씩씩거리는 집주인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저희 딸이, 집 구하는 게 처음이라 뭘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부족한 부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그러자 집주인이 흠흠, 목을 가다듬더니 아니 뭐 그럴 수는 있는데… 그러더니 이내 보증금을 입금하라고 하고는 중개인과 본인이 끌고 온,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저씨 1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꾹 참고 보증금을 입금했고, 그제서야 이삿짐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무 부끄러웠다.
잘 몰라서, 라는 말이 마음에 콱 와서 박혔다.
조금만 미리 알아보면 되는 일이었는데. 한번이라도 확인했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오히려 얕보일까봐 먼저 물어보지 못한 것이 이렇게 돌아왔네. 헛똑똑이처럼 군 자신이 너무 수치스러웠다. 그게 얼마나 뇌리에 박혔는지 그 후로도 월세를 입금할 때마다, 출근하는 골목어귀에 위치한 부동산을 볼 때 마다 이사 오던 날의 기억 때문에 스스로 이마를 한 대씩 쥐어박곤 했다. 거기다 01편에서 이야기한, 이사 첫날부터 나에게 지긋지긋한 기억을 남겨준 사건도 작업실을 지긋지긋해하는 데에 크게 한몫을 했고. 그런 곳에서 솔직히 뭐 얼마나 작업을 잘했겠는가.
하지만 인간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어리버리하게 아빠 뒤에 숨던 나는 1년 만에 부동산에 먼저 전화해서 확인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예 제가 계약할게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집을 내놓으려고 하는데요. 네. 날짜는 XX일이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여보세요 사장님? 아예 네 제가 집을 나가게 되어서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예. 사장님? 언제 오세요? 집 나갔어요? 아 그 날짜는 제가 안되어서요. 예 사장님. 다음 임차인 구해서 예정대로 이사 들어갑니다. 네- 그때 뵙겠습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사실 중간에 설이 껴있었어서 집이 나가는 과정도 끝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다음 세입자를 구한 뒤로는 모든 것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전에 진행한 이삿짐 센터 사장님이 마침 그날 가능하다고 해서 무사히 예약을 진행했고, 이사를 나가고 들어오는 순서도 유튜브 등에서 미리 숙지했다. 가스회사에 미리 전화해 전출 신고를 하고 (사실 이건 부동산에서 해준다) 며칠에 걸쳐 여기저기서 박스를 얻어와 옷을 쌌다. 대용량 일반쓰레기 두 봉지를 꽉꽉 채워 버렸다. (역시나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이어서 하기로 한다.)
만약 내가 작업실을 구한 그 경험이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을 이렇게 빠르게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반쪽 짜리라 하더라도 부모님의 지원 없이- 그러니까 기숙사에 살거나, 단기임대를 하거나, 부모님의 집에 살면서 관리비를 내는 것 정도 외에- 스스로의 주거를 책임져본 경험이 없었더라면 (01편에서 이야기한대로) 친구가 이 집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감히 이사 올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일이 되려면 어떻게 해도 된다고- 분명 운도 있었을 거고 운만이라고 하기에는 파먹은 통장잔고가 시려서 이가 딱딱 떨리지만 어쨌든 나는 나의 성장을 위해 수업료를 치른 거라고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은 허투루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만약 내가 작업실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부모님이 한국에 귀국하시지 않았더라면, 코로*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 땡큐, 코로*이시발라마새끼야!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우니 써보는 여러분은 나처럼 살지 마 Tip.
* 나가기 1달 전에 집주인에게 통보를 해야한다고 하지만 이번처럼 수도권 원룸 월세 중도퇴실인 경우 2~3주 전에 얘기해도 크게 문제는 없다. 다음 세입자만 구하면 되거든. 대신 2년 만기 연장 또는 퇴실 시에는 최소 한달 전에 얘기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부동산에 이사 나갈 날짜와 함께 원룸을 내놓는다.
* 이거 진짜 중요한데, 이사 가는 지역에 자신이 사용하는 인터넷 망이 설치가 안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 중대재해법 2인 1조 의무화 때문에 기사님들 수가 부족해서 인터넷망 설치 차례가 돌아오는데에 한달 가까이 걸린다. 어떻게 알았냐구요? 나도 알고 싶지 않았어요. 덕분에 나 지금 완전 원시인이야. 테더링으로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능한 한 미리미리 이사 가는 지역의 인터넷 상황을 확인하고 신청하길 바란다.
* 도어락 비번은 총 세번 바꾸게 된다.
1. 중개인에게 (내가 문을 열어주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알려 줄 때 - 쉬운 비번
2. 집 나간 직후 - 원래 비번(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은)
3. 이사 나갈 때 - 다시 쉬운 비번
세상 험하다.
* 보증금이 오고 가는/이사 나오고 들어가는 순서
이삿짐을 싼다 > 이삿짐이 다 나갈 때 즈음 중개인 A(원래 내가 살던 곳)에게 전화를 한다 “이삿짐 다 나왔습니다” > 다음에 들어올 세입자가 집주인 A(원래 내가 살던 곳)에게 보증금 입금 > 집주인 A가 나에게 보증금을 입금 (보통 이때 중개인이 내역서를 보내주면서 보증금에서 중개인 수수료 및 남은 임대료와 전기, 가스, 수도료, 관리비를 제하고 입금해도 되는지 물어본다.) > (만약 안 물어본다면) 중개인에게 중개수수료 입금 > 중개인에게 입금 내역서 문자로 송부 > 이사 가는 곳으로 출발 > 가는 중에 중개인 B(이사 들어가는 곳)으로 전화 “저 지금 출발했습니다. 도착 시 다시 연락 드릴게요.” > 도착해서 중개인에게 연락. “도착했습니다. 부동산으로 갈까요?” (이때 집주인이 부동산이나 집으로 오는 경우도 있고, 그냥 인터넷뱅킹으로 돈만 보내기도 함) > 집주인 B(이사 들어가는 곳)에게 보증금 입금/ 입금 내역서 문자로 송부 > 이삿짐 올림 > 이사 끝!
* 이삿짐 올리기 전 비어있는 집안 이곳 저곳(특히 하자가 있는 곳) 미리 사진으로 찍어두면 좋다. 그래야 나중에 덤터기를 안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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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매주 수요일 브런치에서,
만화는 매주 월요일 인스타그램에서 연재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