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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 켈리장 May 31. 2022

선긋기와 호흡

-지금. 여기에서 한국화 가르치기

신발장에 신발이 많은 데 어떤 신발도 신고 싶지 않을 때

옷장에 옷이 많은 것 같은데 어떤 옷도 맘에 들지 않을 때

그러고 보면 오늘은 그냥 나 자신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런 기분이 요즘 자주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생의 계단을 하나씩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계단이 평면이 되면서 끝없는 직선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래서 더 이상 걷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그럴 땐 붓을 들어 직선을 그어보는 거야.

서예 붓에 먹물을 묻히고 숨을 들이 마신 다음 아주 예민한 화선지 위에 직선을 그어보는 거야.

종이의 끝에서 직선이 끝날 때 숨을 내쉴 수 있어.

그럼 알게 되지. 똑바른 직선 하나 긋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그런데 너는 이 직선의 시간을 그래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숨을 참고 선을 긋다 보면 놀랍게도 내 실력이 늘어가는 게 보여.

인생에서 이렇게 금방 성과를 볼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어서 일까. 아님 숨 참고 쉬기를 반복해서 일까.

너는 기분이 아주 괜찮아짐을 느껴.

가로선이 끝나면 세로선을 그어봐.

다시 한번 숨을 참고.

살면서 네 숨을 이렇게 가까이 느낀 적이 얼마나 있어?

하긴 한동안 마스크를 써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숨을 느껴야 했겠지만. 


바른 선을 긋기 위해 숨을 참는 건 내가 초등학교 때 서예 선생님께 배운 거야.

그땐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난 그 시간을 또렷이 기억해. 

왜냐하면 집중했던 순간이니까. 인간의 뇌가 온전히 집중했던 순간은 오래 기억한다고 하잖아.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보다 그때 숨 참고 선을 그렸던 날이 더 생생하게 보인다니까.


나는 선긋기를 하면서 내 앞으로 시간을 데려와.

내 호흡을, 감각을.

똑바로 그어진 몇 안 되는 선을 보면서 생각해. 나 더 걸어갈 수 있겠어.

오늘의 나는 흔들리는 선하나였지만 

내일의 나는 오늘의 연습으로 더 단단해져 있을 거야.

손이 붓을 기억한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붓이 네 손을 기억한다는 것도.

마음이 불안할 때 숨을 참았다가 후-하고 쉬면 심장 박동수가 천천히 내려앉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그러므로. 이제 다시 걸어갈 수 있게 될 거야. 삶이 직선 하나 긋는 것보다 쉽게 느껴져서. 삶이 직선 하나 긋는 것보다 무척 대단하게 느껴져서, 넌 조용히 웃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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