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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osaur Oct 08. 2023

테라피스트 The Therapist

B. A. 패리스


2019년, <비하인드 도어>로 처음 알게 된 작가 B.A. 패리스.

<비하인드 도어>와 <브레이크 다운> 두 작품 모두 업무 중에도 틈틈이 읽으며 '들고 다니는 영화'와 같다고 느꼈다. 작가의 흡입력과 반전에 감탄하며 검색한 차기작 <The Therapist>를 원서로 읽다가 번역본이 밀리의 서재에 게시된 후로는 국문판으로 읽었다.


형용하기는 어려우나 언젠가 분명히 느껴봤던 감정과 순간을, 작가는 쉽고 또렷하게 문장으로 풀어냈다.

그 표현력과 문장력에 감탄하며, 몰입 중에도 잠깐 생각에 불 켜지듯 매료시킨 문장을 옮겨봤다.

이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작가는 작품 속 인물들의 심리를 이용하면서 독자의 심리까지 예측하며 전개를 이끈 것 같다. 난 나름 추리에 강하다고 자신하며 짐작한 결말에 "응 아닌데~?" 하는 반전으로, 작가와의 심리전 완패!



과거

"경제적으로 그럴 필요가 없어서 일자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러니 시간이 남아돈 거죠. 자연히 잡생각이 많아지고 나 자신에게만 골몰했어요. 그 시간에 외부로 시선을 돌려 타인을 돕는 데 에너지를 썼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다니엘이 자원봉사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면서 벌써 몇몇 기관에 연락해 놓았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웃는다. "제가 말했죠. 완벽한 남자라고요."

"큰 발전이네요." 나도 웃으며 답한다.



13장

"그러면 누구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람들한테 말한 대로 얘기하는 수밖에.

"이웃이 아니고 기자였어." 말을 하면서 우리 사이에 너무 많은 거짓이 생기고 있다는 자각에 소름이 끼친다.



16장

"어떤 정보를 원하는데요?"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지난번에도 똑같이 바라보던 게 생각난다.

시선을 돌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의 시선에는 사람의 넋을 빼놓는 구석이 있다.



23장

"앨리스, 전화해 줘서 고마워." 전화기 너머로 안도의 한숨이 들려오자 그에게 내일 집에 와도 좋은지 알려주기로 했던 게 기억난다. 집에 와도 좋다고 하면 기뻐하겠지만, 그때 난 집에 없을 거라고 하면 금방 풀이 죽을 것이다.

"내가 니나가 외도를 했다고 했을 때 왜 펄쩍 뛰었어?" 내가 묻는다.

그가 자신이 짐작하던 용건에서 내가 전화한 목적으로 주파수를 바로잡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7장

어쩌면 내가 생각한 대로 어제 엿들은 대화와 조금 전 탐신과 나눈 대화 모두 내 편의를 위해 무의식이 날조한 건지도 모른다.


나는 아까 현관문을 열러 가다 내려놓았던 내 잔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식탁 위에 있는 걸 보고 잔을 가지러 일어난다. 이브와 탐신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혼란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설명하기 힘든 어떤 기류가 밑바닥에 흐르는 느낌이다.



28장

그의 목소리에서 딱히 어떤 감정이 읽히진 않지만, 내가 너무 빨리 약한 비위를 극복했다는 인상을 주는 건 추호도 싫다.

"가끔 나쁜 일이 일어났는데 이어서 더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잖아. 이를테면 믿었던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면 결국 처음 일은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지."



29장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 집에 머물게 된 게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네, 난 운명이 우리를 제자리로 이끈다고 굳게 믿어요."

"의도적으로 말이죠?"

"네, 그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요."



33장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하철에 앉아 있을 뿐인데, 나처럼 직장에 가려고 매일 집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겐 서클에서 사는 게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겐,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에 오는 일이 고요하고 특별한 안식처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요란한 도시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로 들어가는 느낌이겠지만.



36장

레오에 대해 생각하기 싫어 몸을 돌린다. 풀어놓은 계란을 프라이팬 두 개에 붓고 천천히 익힌다. 잘 익은 가장자리를 중앙으로 당기고 덜 익은 계란을 남는 공간으로 흘려 붓는 단순한 행위가 이상하게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과거

나는 탁자에서 메모지를 집어 들고 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메모지 대신 노트북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고객들은 메모지에 적는 구식을 여전히 좋아한다. 노트북을 사용하면 우리가 그 뒤에서 뭘 하는지, 그러니까 메모를 하는 건지 넷플릭스를 보는 건지 자신들이 알 수 없어서인 것 같다.



6개월 후

안 그래도 그가 니나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서 당황하고 있던 차에 혼란이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신뢰해도 될 것 같은 그 사람에게, 로나 아주머니의 은밀한 경고로 의도치 않게 생긴 불신과 의심이 주변 사람들과의 우정을 물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결같음을 상징하게 된 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 것이다.


나는 식탁에 앉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마저 읽다가 잠시 멈춘다. 이따가 레오가 이브와 잘 만났는지 물으러 전화할 것이다. 오늘 벌써 큰 걸음을 내디뎠다. 어쩌면 한 걸음 더 내디딜 때인지도, 집들이 파티에 왔던 그 남자에 대한 진실을 마침내 그에게 털어놓을 때인지도 모르겠다.

진실, 세상에 진실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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