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쿠비카
프롤로그 - 11년 전
남자는 묘한 표정으로 지나치게 오래도록 여자를 바라봤다. "이런 멍청한 짓거리를 하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죽더라고."
남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늦은 밤 여자 혼자 달리는 걸 말하는 건지 아니면 남편을 속이고 외도하는 걸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길을 따라 걸었다. 적막한 밤이었다. 낯선 남자가 잠시나마 자신을 만족시켜 줄 거라는, 행복에 취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기대에 흠뻑 빠진 지금이 하루 중 유일하게 반가운 시간이다.
딜라일라 - 현재
보이지 않아도 누가 뭘 한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곳에서 함께 오래 지내며 서로의 습관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아니야." 변기 뚜껑을 떨어뜨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찔한 상상을 지우며 그에게 답했다.
지금껏 누군가를 해치거나 죽이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잔인한 면도 없다. 아니 적어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어둠 속에 갇혀 살다 보면 나쁜 마음이 생긴다. 사람이 달라진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 나는 남자와 여자가 앗아간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거스가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이토록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거스는 내게 최고의 선물이다.
"배가 안 고프지?" 여자의 질문에 정답이 무엇일까 잠깐 고민했다. 배가 고팠다. 그저 여자의 음식을 먹고 싶지 않은 거였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기껏 고생해서 식사를 준비한 여자가 화를 낼 것이다.
초코바를 한 입 더 먹었다. 설탕이 혈관으로 퍼져나갔다.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케이트 - 11년 전, 5월
메러디스가 딱히 스트레스가 심하다거나 조용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야 할 상황에서는 누구나 멀쩡한 얼굴을 한다.
조시와 메러디스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결혼 생활을 누렸다. 서로에게 언제나 정직하려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결혼 전에 두 사람은 화난 채로 잠들지 않기로 약속했다.
결혼 생활이란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다. 비아와 나도 다툴 때가 있다.
메러디스 - 11년 전, 3월
아이가 처음인 아빠들은 항상 호들갑을 떤다. 그래봤자 아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방문할 즈음이면 부부 중 좀 더 차분한 쪽은 진통 중인 산모일 때가 많다. 매번 긴장한 남편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사실 남편을 진정시키라고 돈을 쓰며 나를 고용한 것은 아닌데 말이다.
모두에게 긴 밤이 될 것이다. 출산은, 특히 초산인 산모에게는 단거리 전력 질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너무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투를 자제하고 해야 할 말만 전달하도록 주의했다.
손을 너무 부주의하게 움직인 나머지 거품이 아이의 눈에 들어갔다. 뻔히 보면서도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이 거품이 잔뜩 묻은 손으로 아이의 이마를 닦아내는 것이었다.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오히려 독이 되었다.
레오 - 현재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의 기억력이란 이상하다. 어렸을 때 누나랑 같이 놀거나 엄마가 자장가를 불러주는 추억이 왜 떠오르지 않는지, 베이컨 냄새만 맡으면 왜 속이 울렁거리는지 그 이유를 파헤치려고 내현기억과 외현기억에 대해 얼마나 많이 조사했는지 모른다.
누나가 다섯 살 때 그네를 너무 세게 민 나머지 내가 떨어지며 얼굴을 땅에 박은 적이 있다.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빠가 하도 자주 들려준 터라 꼭 내가 실제로 기억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집에 도착하니 눈앞에 미디어 서커스가 펼쳐져 있다. 기자 무리를 헤치며 차를 움직이던 아빠가 한 말이었다. 미디어 서커스. 그 말을 들으니 기자들이 광대, 서커스 기인처럼 보였고, 일면 그렇기도 했다.
메러디스 11년 전, 3월
나도 요가 수행을 좋아한다. 하지만 요가를 가르치는 일은 반복적이고 너무 일상적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항상 단정한 차림을 유지한다. 깔끔한 차림이 자신감을 높이고 상대에게서 존중을 끌어낸다고 믿기에 그는 늘 정돈된 차림으로 고객을 대하려 한다. 충분히 이해했다. 거울에 비치는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말도 안 되게 멋진 남자가 내 남편이다. 나는 어쩜 이렇게 운이 좋을까? 한 번씩 생각한다.
케이트 - 11년 전, 5월
멋진 공간이지만 비아의 일터이기 때문에 나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일하는 곳에 비아가 한 번도 오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관계에서는 바운더리가 중요하다.
요즘 내가 비아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때는 그녀가 샤워할 때뿐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공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비아는 사적인 공연에는 무척 인색한 편이다.
비아는 음악을 만들 때만큼은 세상과 단절한다. 다른 세계를 완벽히 차단한다. 비아가 한참을 안 보이면 음악에 온전히 몰입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행복한 마음으로 응원해 준다.
"조시에게서 소식 없었지?" 비아에게 물었다. 이른 시간이었다. 별 기대 없이 물은 말이었지만, 뜻밖에도 비아가 답했다.
레오 - 현재
실종되었을 동안 학대를 당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른 일이다. 갑작스럽게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누나가 안쓰러웠다.
메러디스 - 11년 전, 3월
하지만 속에서는 짜증이 솟구쳤고, 미소로 조급함과 불안을 보기 좋게 가린 상태였다.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난 것 치고는 그럭저럭 버티는 중이었다.
조금씩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가 시야에 있음에도 벌써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딜라일라가 처음 어린이집에 등원하던 날의 기분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에게 내 아이를 맡기며 명치끝에서부터 올라오던 그 불안함이 떠올랐다. 지난 몇 년간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 자신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었음에도 아이들이 태어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가 괴로웠다.
케이트 - 11년 전, 5월
크레파스는 없어질 수 있다. 퍼즐 조각도 없어질 수 있다. 하지만 엄마와 누나가 없어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조시가 레오에게 두 사람이 어디에 갔다고 설명했을지 궁금했다.
부부가 마흔이 되면 이국적인 곳으로 여행을 떠날까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당장 목전에 와 있다기보다는 부부가 좀 더 고민해 보고 결정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듯이 말했고, 몇 년 후의 일이긴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투로 이야기했었다.
비아와 나는 몸을 돌려 천천히 인도 쪽으로 움직였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느라 둘 다 말이 없었다.
걸음을 옮기던 비아가 가만히 손을 잡았다. 의지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힘이 되었다.
밤에 현관 베란다에서 메러디스와 조시, 비아와 내가 함께 술자리를 가질 때면 메러디스가 종종 카산드라 이야기를 꺼냈었다. 지나치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어느샌가 카산드라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등장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미 신문에 난 후였다. 이미 뱉은 말을 취소할 방법은 없었다. 그에 대한 여론이 이미 형성된 후였다.
메러디스 - 11년 전, 5월
수강생들에게 편한 자세를 취하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호흡에 집중했다. 현재의 마음과 육체를 깊이 인식하도록 했다.
나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토닥거렸다. 연구를 통해 신체적 접촉이 개인의 감정과 건강, 상대를 향한 호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촉각 자극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케이트 - 11년 전, 5월
하지만 강을 따라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내려가면 숲이 시작된다. 말끔하게 손질된 넓은 거리는 온데간데없고 오랜 시간 행인들의 발자국으로 다져진 길이 시작된다. 나무 사이로 풀과 잡초를 가로지르는 좁은 길이다.
레오 - 현재
누나는 부드럽고 따뜻한 침대에서 내려와 어둡고 차갑고 딱딱한 지하실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지난 11년간 그래왔으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누나는 어둡고 음울한 지하실에서 위안을 얻었다.
사람이 이보다 더 망가질 수는 없다.
"잠드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내가 아프거나 슬플 때 이 담요만 있으면 기분이 나아졌거든." 나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케이트 - 11년 전, 5월
샬럿의 머리가 하얗게 세어가고 있었다. 두 눈은 회색빛이었다. 눈과 입가에 깊이 새겨진 주름이 미소를 짓자 더욱 깊어졌다. 미소가 다정한 여인이었다.
내가 말했다. 흥분 상태였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와인을 마신 탓에 하고 싶은 말을 참기가 어려웠다.
메러디스 - 11년 전, 3월
부드럽고 느긋한 입맞춤을 나누며 남편과의 키스라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새삼 생각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더없이 행복한 이 1분 동안만큼은 지난 며칠간 나를 괴롭히던 불안이 누그러졌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조시는 이렇게 말하고 집을 나섰다. 항상 누군가는 집에 있고 누군가는 급히 집을 나서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나도 그 나이 때는 내가 다 큰 줄 알았다. 10년도 지나 돌아보니 스물셋, 스물넷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였다. 아직도 더 성장해야 할 나이였고, 세상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나이였다.
레오 - 현재
내 담요를 안고 있는 누나를 보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온갖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누나가 민망해할까 봐 굳이 담요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원래도 나는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다. 담요를 못 본 척 넘겼다.
누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말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한심한 소리만 늘어놓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침묵하기로 했다.
메러디스 - 11년 전, 3월
"내 친구들을 뺏으려고 하잖아. 엄마, 걔는 도둑이야. 친구 도둑."
"그랬구나." 마음이 아팠다. 5년 후, 10년 후에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말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열여섯 살이 되면 오늘 경험한 이 작은 실망감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이의 아픔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들은 슬픔에 빠진 여섯 살 아이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한다.
메러디스 - 11년 전, 4월
졸업 후 연락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마티를 거의 잊고 살았다. 물론, 문득 이런저런 생각에 빠질 때면 한 번씩 그를 떠올리기는 했다.
케이트 - 11년 전, 5월
"당연히 아니지."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백이 아니라 그가 정말 내 친구에게 무슨 짓을 할 만한 사람인지 살펴보는 거라고, 어떤 느낌의 사람인지 직접 만나보고 싶은 거라고 설명했다.
진찰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에서 배려가 느껴지지 않았다. 두 번 대충 문을 두드리고는 곧장 의사가 들어왔다.
내가 진료를 보는 산부인과 의사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1년에 한 번씩 병원에 가는 나를 의사가 정말 기억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지도 않았다.
수의사인 나도 검사를 하기 전에 개들에게 내 냄새를 맡게 한다. 내가 개의 몸에 손을 대기 전에 인사를 나누는 방식이다.
"아직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격려하는 말이었고, 나를 안심시키려는 말이겠지만 그런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따뜻한 미소 아니 거짓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닥터 파인골드는 내가 혹시라도 여기서 눈물을 보일까 봐, 울더라도 집으로 돌아가 혼자 울기를 바라며 선을 긋는 것 같았다. 환자가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면 귀찮아지니까. 그런 건 질색일 테니까.
닥터 파인골드가 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손을 뻗어 라텍스 장갑을 꺼냈다. 제자리로 돌아온 그가 내 앞에 서서 장갑을 한쪽씩 꼈다.
의사가 장갑을 끼는 모습처럼 보이지 않았다. 살인자가 지문을 감추기 위해 장갑을 끼는 것처럼 보였다.
메러디스 - 11년 전, 4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검사에 동의하는 것이 중요했다. 자신이 무엇에 동의하는지 분명 알아야 한다.
진통 중인 산모는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의료진이 필요한 입장이니까. 이런 연유로 편의성이나 효율성을 위해 출산 중 산모에게 불필요한 행위가 가해지는 게 문제다. 출산 도우미 일을 하며 보디가드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많다.
셸비는 진통을 잘 견디지 못했다. 고통에 대한 한계치가 낮았다. 나는 셸비의 옆에 앉았다. 호흡하며 진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왔다. 통증에 사무친 나머지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묻지 말았어야 했다. 말을 하자마자 후회했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닌데.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끼어들어선 안 되었다.
자궁문이 10cm 열리자 자궁 수축으로 자연스럽게 아이가 좀 더 내려오길 바라는 간호사는 셸비에게 잠깐 힘을 주지 말고 참아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궁 수축은 참아내기 어렵다. 당장이라도 아기를 밀어내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휩싸인다.
제이슨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복도로 나가 있는 게 좋겠다고 했다. 제이슨은 내 말을 따랐으나 몇 분이 지나자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좋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고객들이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지금껏 최선을 다해 싸워왔다. 특히나 지금처럼 셸비가 약자이고 닥터 파인골드가 강자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출산은 어떻게 행해지든 위험이 따른다. 나야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산모에게 이런 위험을 알려주어야 한다. 산모에게 주어진 선택지들을 따져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케이트 - 11년 전, 5월
비 때문에 방향감각이 엉망이었다. 여기가 어디쯤 인지도 헷갈리던 차에 순간 집으로 가려면 이번 교차로에서 꺾어야 한다는 사실일 떠올랐다. 무작정 핸들을 급히 꺾었다. 교차로의 땅이 꺼졌는지 물웅덩이가 깊게 형성되어 있었다. 잠깐 동안 차가 접지력을 잃고 물 위를 활주 하듯 미끄러졌다. 브레이크를 밟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며 차가 알아서 진정되길 기다렸다.
달리 뭘 어쩔 수가 없어 계속 차를 몰았다. 우리를 겁줄 의도였다면 성공이었다. 너무 긴장되어 운전하는 법을 잊은 것만 같았다. 양손을 핸들 위 10시 2시 방향에 놓고는 느린 속도로 차를 몰았다.
레오 - 현재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악행에는 끝이 없다.
메러디스 - 11년 전, 5월
아이를 향해 웃으며 삶이 딱 이 정도로만 복잡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아이가 안타깝기도 했다. 소외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순간 말을 잘못 꺼냈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다르게 말했어야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선 안 되었다.
"나라면 절대 메러디스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난 친구에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뼈를 찌르는 말이었다. 자신은 친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지만 난 그렇다는 말이다.
내게 복수를 하기 위해 내 아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저열한 방법을 쓰는 카산드라에게 소름이 끼쳤다.
레오 - 현재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파이퍼 해너카가 내 앞을 막아섰다. "무시해, 레오. 쟤는 그냥 너 긁으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마."
대학에 가기 전에 헤어지기로 약속했다고 들었다. 둘 다 서로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아 했다. 파이퍼가 언젠가 만날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겠지,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언뜻 들으면 어른스러운 말이었지만 동시에 한심하기 그지없는 헛소리였다.
떠났다고 말했다. 누나에게 선택권이 있었던 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을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내게 누나 이야기를 하며 잔인하리만치 직설적인 말로 상처를 주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또한 다들 군중심리에 굴복해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 때도 거기에 휘말리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과 비슷하다.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이라는 이론) 사실, 불행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케이트 - 11년 전, 5월
"디키 실종사건에 대해 제보하고 싶어서요." 잠시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았다. 와인이 들어가자 날카로웠던 신경이 무뎌지는 한편 용기가 샘솟았다.
20분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길고 멀게만 느껴졌다. 가는 내내 우리는 각자 생각에 빠져 아마도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침묵을 지켰다.
메러디스 - 11년 전, 5월
사실 우리 부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말여행이다. 미시간에 계신 조시의 부모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이틀만 아이들을 봐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우리는 시내에 있는 포시즌스 호텔에 방을 하나 잡는 거다. 잠시나마 아이가 없는 성인의 삶을 즐기기 위해 말이다. 공연도 보고 아침에 7시 넘어 일어나는 그런 하루.
고개를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조시의 손이 내 몸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오늘 여기서 하려던 말이 모두 지워져 버렸다.
차에 탑승했다. 비아가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켰다.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나는 취기와 더불어 온몸에 퍼지는 행복을 느꼈다. 비아가 주차장 건물을 빠져나와 거리로 향했다.
교통사고 대부분이 집에서 8km 이내에서 발생한다고들 한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빠지면 무력감이 찾아왔다. 이런 무력감이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단순히 옷만이 아니었다. 매일 마주하는 아주 사소한 결정 하나하나에 사고가 정지하는 것 같았다.
죄책감은 너무도 무거운 짐이다. 지워지지 않을 상흔이 새겨졌다.
"몸이 안 좋아요." 거짓말이 아니다. 죄책감은 비단 감정의 영역만이 아니다. 물리적으로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두통이 있었고 허리도 아팠다. 속이 꽉 막힌 듯 불편했고 변비도 심했다.
조시는 몸에 열이 많은 편이다. 겨울에도 잘 때 창문을 열지 않으면 더워했다. 봄의 시원한 밤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얇은 커튼이 펄럭였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레오 - 현재
대수학은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과목이다. 대수학은 옳거나 그르거나 뿐 중간이 없어서 좋다. 인생과 달리 모호함이 없다. 삶은 모호함 투성이다.
"... 지난 세월 동안 조시를 향한 마음이 커졌고, 어떻게든 딸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제게는 단순한 실종사건이 아니었어요. 그 이상이었어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랬어요. 이렇게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켜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요. 선이란 게 분명 있는데요. 조시는 그 선을 넘지 않았지만, 전 넘었어요."
형사가 잠시 가느다란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경찰서에서는 이런 설명을 내놓았다. 거짓 기억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진짜 기억인 것 같지만 사실 만들어진 가짜 기억이다. 정신이 거짓 기억을 만들어낼 때도 있고, 누군가의 농간으로 애초에 있지도 않은 일들을 기억인 것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기억은 조작할 수 있다. 사람의 머리에 생각을 주입할 수도 있다. 경찰은 여자에게도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케이트 - 현재
두 사람은 미디어의 대대적인 보도와 관심을 원했고, 온 나라가 공포에 떨길 바랐다. 두 사람이 한 짓은 이성적인 사고 범위에서 벗어나도 한참이나 벗어나 있어 도무지 이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비극적인 일이었다. 비아가 저지른 일의 파장이 너무도 컸다. 그녀는 피해자들에게만 죄를 지은 게 아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을 아프게 했고, 너무도 많은 사람의 삶을 짓밟았다.
매일 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니었다. 비아가 망가뜨린 수많은 사람을 위한 눈물이었다.
저녁에 가끔 조시의 집 현관에 앉아 맥주를 마신다. 레오와 딜라일라가 평범한 남동생과 누나처럼 아옹다옹하며 노는 모습을 지켜본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회복이 빠르다. 아이들은 상처를 더욱 빨리 딛고 일어선다.
상처에는 시간이 약이라고 한다.
조시와 딜라일라, 레오가 그 증거였다.
내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언젠가 그때가 내게도 올 거라 믿고 있다.
옮긴이의 말 - 공교로움이라는 말로 포장한 개인의 악의
중심 화자는 있지만 조연은 없는 느낌이었고, 작가가 얼마나 공을 들여 쓴 작품인지 새삼 느낀 지점이다.
충격적인 소재만으로도 몰입감이 커지지만 무엇보다 소제목으로 등장하는 화자의 시점뿐만 아니라 각 화자의 타임라인이 다르게 펼쳐지는 덕분에 겹겹이 화성을 쌓아 올린 음악처럼 스토리의 입체감이 살아난다.
저자는 이런 일상적이고도 어찌 보면 평범하기까지 한, 하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면 묘하게 뒷맛이 씁쓸해지는 이야기들로 알게 모르게 독자들을 긴장시킨다. 슬쩍슬쩍 독자를 건드리는 언짢은 요소들은 가랑비에 진창이 되고 마는 땅처럼 독자들의 발을 무겁게 잡아끈다.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 위에 담요를 덮어주는 행위를 보며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은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상대를 해치겠다는 악의가 아니라 나를 지키겠다는 선의는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공교로움이란 말로 포장한 개인의 악의는 얼마나 이해받을 수 있을까. 의도한 거짓말과 의도치 않은 비밀은 정말 다른 걸까.
방백
머리에 생각이 많아 잠을 못 이룰 때면, 잠시나마 생각을 Off 할 수 있도록 소설을 찾는다. 히가시노 게이고만큼 상상으로 장면을 만들어내는 스릴러 소설을 찾던 중 만난 메리 쿠비카의 <사라진 여자들>.
소설의 전개 방식이 흥미로웠다. 4명의 주요 인물의 시점에서의 단편으로 장면 전환을 일으키며, 독자가 릴레이 달리기를 하듯이 이야기의 바톤을 이어가게 한다.
일상에서 느껴본 감정과 생각들, 무심코 지나간 형상들을 잘 풀어낸 문장들을 옮겼다. 이 소설의 화룡점정은 옮긴이 신솔잎 님의 리뷰가 아닐까 싶다. 내가 소설의 전개방식에 대해 느낀 바를 대변하듯 구체성을 더해 와닿게 표현한 것과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관점에 대한 언급이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