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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 Feb 04. 2022

신유물론, 국소적인 정체성 정치를 인정한다.

신유물론 강의 후기 1

안무가, 아티스트 리서처로 활동하면서. 최근 무용공연과 기후 액티비즘이 신유물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특히 기후 액티비즘 퍼포먼스를 하는 동료들이 도나 해러웨이와 안나 칭의 열렬한 팬들로 그들의 이론과 글쓰기에 큰 영향을 받고 기후와 생물다양성 관련 액티비즘을 하고 있다. 나도 그 흐름에 관계하면서, 이 새로운 이론들에  굉장히 매력을 느끼고 가능성/잠재성의 힘을 얻지만, 동시에 액티비즘을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기 힘든 모순을 느꼈다. 신유물론에 대해 자세히 배우고 이해하며 지금 느끼는 문제점을 풀어보겠다는 기대로 수유너머의 ‘신유물론, 이론의 새로운 전장’ (강사: 박준영) 강의를 듣게 되었다. 지난 3주간 세 차의 강연 동안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문장과 질문들이 있었다. 내가 처한 상황에 적용이 되는 이론들을, 예술과 액티비즘 실천의 현실에 맞대어보며 강의 후기글을 쓰려고 한다. 



무용분야에서는 2000년 전후로 개념 중심적인 무용 작업, 농 댄스 혹은 컨셉추얼 댄스의 사조가 만들어졌다. 정치 사회적 이슈와 담론을 적극적으로 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해석한다. 이에 대한 반성적 경향으로 포스트 댄스라는 춤의 존재론적 성격을 강조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며 언어와 담론의 한계 관한 것이 지적되었다. 포스트 댄스를 말하는 혹자는 우리가 언어로 말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 자본주의에 의해 포섭될 수 있다고 했고, 미학의 세계와 지식의 세계는 공존할 수 없다고 까지 했다. 이 흐름과 동시에 (동료 안무가들의 최근 작업을 보면) 인간 퍼포머 중심이 아닌 다른 물질적 대상들, 공간 등에 집중하는 작업 경향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흐름으로 넘어가면서 걸리는 부분이 생겼다. 



우선 위에 언급한 포스트 댄스의 단호한 주장은 어떤 정치적, 담론적 성격을 띠는 예술작업들의 가치를 상실시켜버리기에 문제적이었다. (이 ‘주장’ 자체가 이분항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다음은, 사회적 담론 논쟁이 가진 이항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 급격하게 존재론적인 것으로 전환하면서 우리가 마주한 정치성, 정치적 문제들, 여전히 계속되는 소수 그룹의 차별의 문제들이 도외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이 강의의 첫 시간 다음의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신유물론은 국소적인 정체성 정치를 인정한다. 신유물론이 이분법을 다루는 태도와 전략은 이분법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거리를 두고, 이분화된 것 사이를 차이화하는 것이다


이 차이화 속에서 어떤 극단적인 경향의 페미니즘 운동을 포함해서, 이분화된 항들 사이의 수많은 미시적인 운동들이(이분법을 벗어났든, 벗어나지 못했든) 모두 인정되는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어 성평등 강의를 하는 강사인 한 동료는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실제 페미니즘과 퀴어 운동과 만났을 때, 이론가들과 실제 운동가들과의 격차를 목격해왔다. 이론적으로는 남녀 섹스/젠더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그 성적인 차이화의 지점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제 운동에서는 아직도 여성과 소수자들이 처한 차별적 상태가 너무나 커서 당사자들은 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조차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유물론론이 정체성 정치가 국지적으로 필요하다고 했을 때, 이러한 이론과 실제의 격차를 매워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법적 차별을 겪었던 이들이 계속해서 정체성의 정치와 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러한 운동과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새로운 주름이 점점 깊어지면, 그때는 이미 남-녀 혹은 이성애자-동성애자의 차별이 희미해지지 않았을까. 새롭게 생성된 관계가 이미 안정화된 상태가 되어 과거의 이분법은 이미 잊어버린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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