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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 Jul 29. 2021

기후 퍼포먼스 액티비즘과 수평적 공동체의 가능성

익스팅션 리벨리온 Extinction Rebellion과 비커밍 스피시스

“그것은 수많은 이종적 조건으로 구성되는 다양체(multiplicity)인데 이것은 다양한 특성들-즉 나 이, 성, 통치(reigns)-을 가로질러 그들 간의 연결 (liaisons), 관계(relations)를 수립한다. 그래서 아상블라주의 유일한 단위는 공동 기능하는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공생(symbiosis)이며, 동조(sympathy)이다. 그것은 분파(filiations)라기 보 다는 동맹(alliances), 합금(alloy)이며, 세습(suc- cessions) 또는 혈통(lines of descent)이 아닌 전염 (contagions), 유행병(epidemics), 바람(wind)이다."

(Deleuze and Parnet, 1987, 69; Muller, 2015, 28에 서 재인용)


제인 버넷의 '생동적 물질 Vibrant Matter'을 읽다가 그녀가 인용하는 들뢰즈의 '아상블라주 Assembalge' 개념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개념을 더 자세히 설명해주는 논문들을 찾아 읽다가, 들뢰즈가 1987년에 인터뷰에서 말했던 위의 문장을 찾았다.


공생, 공조, 동맹, 합금, 전염, 유행병, 그리고 바람...


위의 텍스트를 읽고 순간 소름이 돋았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후 운동 그룹들, 그 중에 하나로 내가 참여하고 있는 기후 운동 퍼포먼스 콜레티브인 비커밍 스피시스 Becoming Species (Climate Activism Performance Collective)의 성격을 그대로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2019년 코펜하겐 대학에서, 아브라함의  세 종교(크리스차니티, 유대교, 이슬람)의 역사와 분쟁을 공부할 때, 나는 마음속이 체한 상태였다. 유럽의 다문화주의를 말하면서, 식민지 역사와 그것이 타문화에 남긴 영향들을 따로 다루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2-3년간 유럽 중심적인 사고, 식민주의 시대에 대한 몰이해를 마주했다. 


그러던 차에, 기후 문제에 오래 관심을 가지고 있는 파트너를 따라 익스팅션 리벨리온 Extinction Rebellion이라는 기후 운동 그룹의 강의에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운동가 '이다'의 '기후위기'강의를 들었고, 처음으로 덴마크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느낌이었다.


이다는 기후 위기의 원인을 서구 모더니티의 인간 중심적 사고로 보고,

지구 자연환경과 자원을 향한 대규모 약탈의 시작을 식민주의 시대로 보았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급격한 증가량을 보이는 시기는 바로 근대 식민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 1890년.

그녀는 덴마크와 같은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이 가진 특권을 말했고, 그들의 소비량이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이 높음을 지적했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여 만들어낸 에너지 자원과 상품들을 가장 적게 소비해왔던 제 3세계 혹은 남반구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또 가장 크게 기후 위기의 고통을 받게 될 것 또한 지적했다. 따라서 그녀는 덴마크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가진 특권을 이용하여 기후운동에 동조해달라고 설득했다.


(덴마크를 포함한 노딕 국가의 높은 소비량에 관해서는, The dark side of the Nordic model:

Scandinavian countries may top every ranking on human development, but they are a disaster for the environment, 2019, Aljazeera )


나는 이 친구의 열정적인 메니페스토에 사로잡혔고, 그녀의 활동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2020년부터, 익스팅션 리벨리온 패밀리 그룹으로 가족 활동과 만남들을 가졌고,

시적인 방식의 기후 액티비즘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9명의 여성들이 모여 예술적 프락티스와 우발적인 퍼포먼스를 공공장소에서 하였다. 어떤 결과물, 대가, 수익을 계산하지 않고, 성글고 여유롭게 모여, 다생물종의 공존을 위한 액티비즘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들 중 한명인 린은 아트와 액티비즘을 합쳐 악티비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


익스팅션리벨리온의 스프링 리벨리온에서 다른 생물종이 되는 것처럼 명상을 하고 움직이며 시내 거리 행진, 블랙프라이데이날 시내에 나온 사람들과의 대화 및 퍼포먼스, 코펜하겐의 거의 유일한 야생지대인 아마펠러를 개발하려는데 반대하는 운동을 지지하는 퍼포먼스 등. 이 콜레티브안에서 각자가 가능한만큼의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나누고 함께 움직인 결과, 우리의 활동은 덴마크 내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 순식간에 알려지고 퍼져나갔다. 마치 '나'라는 사람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아도, 나의 AI가 대신 일을 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나, 보이지 않는 집단지성이 존재하여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연구자나 매체로 부터 기후 운동이나 다생물종 워크샵에 대한 협력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땅 속 균사체와 뿌리의 거대한 연결망처럼 순식간에 분산되어 다수의 사람들에게 뻩어나가는 힘을 경험하였다. 그렇기에 위의 들뢰즈의 문장은 정말로 우리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만 같았다.

 

 


기후 운동을 할 수 있다는 특권


사실 익스팅션 리벨리온 Extinction Rebellion은 백인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예를 들면 스웨덴 기후 운동가 소녀, 그레타 Greta Thunberg는 다른 피부색을 가진 청소년 액티비스트들에 비해 더 주목을 받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와 유사하게 다른 인종들이 중심이 되는 액티비즘 그룹에 오래 활동해왔던 것에 비해 왜 영국에서 시작된 백인 중심의 익스팅션 리벨리온이 더 하이라이트를 받느냐는 비판이 있었다. 실제 영국과 유럽에서 행해지는 익스팅션 리벨리온의 기후 액티비즘에서는 백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 가지는, 유럽 내 타인종들이 경제적 사회적 기반이 약하고 정부에 저항하는 행위를 할 경우 백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비커밍 스피시스의 퍼포먼스 일환으로 지하철 역 앞에서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었다. 퍼포먼스를 시작한 동시에 경찰들을 가득 태운 밴이 도착하였다. 당시 나는 2살 아들을 옆에 두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내리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모든 행위를 멈추고, 아들을 안고 그 공간을 벗어났다. 입고 있던 의상을 그 자리에서 벗고, 분장을 지웠다. 짧은 시간, 온갖 생각이 들었다. 경찰이 행여나 나의 주민번호를 가져가고, 그것이 덴마크 이민국에 알려졌을 때, 내가 덴마크에 가족 재결합 비자로 지낼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면 어쩌지? 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함께 경찰서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덴마크어와 영어로 나의 상황을 제대로 반박할 수 있을까?


이 일을 겪은 후 깨달았다. 백인, 여성, 덴마크 국적으로 기후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며, 나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국가 출신으로 많은 혜택을 보고 있지만, 이곳에서 나의 위치는 불완전하다는 것. 인종, 국적, 국가, 시민권, 이민으로 인한 차별이 다시금 보였다. 만일 내가 중동 출신의 남성이었다면 이런 상황은 더없이 불리했을 것이다. (관련해서, 조나단의 작업 '새 관찰'이 떠오른다. 그는 영국 출신이지만, 중동 남성처럼 보이는 외모 때문에, 덴마크에서 경찰들에게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 작업에서 그는 인간의 이주와 새의 이주를 평행시킨다. )        

아들과 함께 한 지하철 퍼포먼스 중

수평성, 분권, 자율성


익스팅션 리벨리온과 비커밍 스피시스가 어떻게 '바람'과 같이 퍼질 수 있었을까? 특히 익스팅션 리벨리온은 어떤 경제적 수익구조 없이, 전 세계의  액티비스트들과 대중의 참여를 얻으며 뻗어가고 있다. 그 이름 아래, 기후 위기를 불러온 현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서로 다른 방법과 실천 방식을 가진 소그룹들이 계속해서 생성된다.


한 중심적 인물이 힘을 축적하고 다수의 사람들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다. 단기 목표 혹은 기후 액션에 따라 만들어진 소그룹들이 각자의 활동을 계획하고 진행한다. 그들은 완전한 자율성을 지녀서, 그룹들끼리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을 지닐 수도 있다. 이러한 수평적인 구조는 땅 속을 횡단하며 자라나는 뿌리인 리좀과 닮았고, 각 부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기관 없는 신체와도 닮았다. 한 그룹이 쉬고 있더라고 다른 그룹이 무언가를 생성해내며, 끊임없이 지속되는 힘이 존재한다. 


비커밍 스피시스의 경우 그룹 안의 수평성과 자율성 덕분에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물론 너무 여러가지 의견이 나와서 하나로 의사를 좁힐 때까지 그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멤버들의 동기부여가 떨어져 작업이 진행이 더뎌지기도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각자 동기부여가 생기는 액션이나 워크샵을 운영해가기로 했고, 각 프로젝트 마다 가장 그 프로젝트에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있는 이가 단기 코디네이터를 맡아서 작업을 진행해나간다. 하나의 그룹이 계속 동기와 의지를 가지고 유지되기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우리는 우리가 영속해야한다는 의지자체가 없다. 우리 이외에 어느 누구도 우리의 활동에 영감을 받아 또 다른 비커밍스피시스를 만들어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아직까지는 새로 제안된 프로젝트에, 또 서로의 아이디어와 재능에 의해, 서로가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며 배우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소유권을 넘어 지식, 정보, 방법의 공유와 전파


누군가 나에게 무용공연의 작업과 기후 퍼포먼스 작업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질문한 적이 있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겠지만, 나에게 인상적인 차이는 소유권, 작가주의의 차이이다. 기후 운동 안에서는 자신이 가진 지식, 정보, 방법론을 서로에게 노출시키고, 전파한다. ‘이렇게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아도, 옆에서 본 긍정적인 부분들을 다른 소그룹이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재생산한다. 동시에 지식, 정보, 방법론을 준 이은 자신이 만든 방법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모방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 소유권은 그것을 만든 이에 대한 존중과 존경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의 기후 운동가 그룹이 처음으로 그 나라의 가스관을 막는 시위를 벌였고, 그것을 나른 나라, 다른 지역의 기후 운동가 그룹이 그 아이디어와 방법론 똑같이 따라했다고 해서 전자가 후자를 소송하거나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깐. 자연 착취적 자본주의 구조에 태클을 거는 것. 이것은 오히려 자연의 모습과 닮을 것 같다. 땅 속의 영양분과 정보들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전달하고 분배하는 균사체가 각자가 발견한 영양분과 정보에 관해 소유권을 행사할까? 그들이  다른 식물과 나무의 뿌리에 적절하게 영향분을 공급한 것에 대해 인정을 요구할까? 


하지만 이것은 현대예술과 학문 안에서는 전혀 달라진다. 하나가 옳거나 옳지 않다, 혹은 어느 하나가 더 이타적이고 이타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아니라, 전자와 후자가 서 있는 세계관이 전혀 다른 것 같다. 후자가 근대의 사유세계 위에서 설립되어왔다는 것이 드러난다. 왜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언제나 새로워야하는 작품과 작가의 고유성은 근대의 예술가가 천재와 같은 인물의 창의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그 시대만을 담은 세계관으로부터 바탕을 하고 있다. 관계적인, 우리의 상호의존성,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 다의성, 다자성을 근간으로하는 예술작품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우리(나) 안에서 여전히, 이 작품은, 저 작품과 닮았고, 그 전 작품에 비해 더 새롭게 발전되지 못했어 등의 시각으로 보게되는 것은 왜 일까.


일단 예술작업과 기후 운동 작업 모두 이것이 어디서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확실하게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정동관계 안에서 다른 존재의 노력에 보내는 인정, 존경과 감사라고 생각한다. 


  


콜렉티브의 지속성과 동맹


새로운 콜렉티브 공동체 안에 있는 개인들-액티비스트들, 예술가들 등등은 공통된 문제를 마주한다. 이 콜렉티브 액티비즘을 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느냐? 영리가 존재하지 않았어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신념만으로 이러한 거대한 국제적 콜렉티브가 생성될 수 있었는데, 이것의 지속성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나는 정부와 기업과 예술가와 학자와 개인들의 동맹을 상상한다.  

들뢰즈의 ‘전쟁기계’와 ‘국가’. 그는 결코 ‘전쟁기계’ 대 ‘국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전쟁기계는 국가를 재-영역화/탈-영역화하는 창발적 힘을 지닌 사회적 조직으로 국가 장치 안에 들어와서 일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 국가 장치를 교란하고, 자기 자신마저도 탈-영역화한다.


사실 익스팅션 리벨리온과 비커밍 스피시스의 활동에 간간이 참여하는 나의 친구들은 (나를 포함하여) 덴마크의 복지 체제의 혜택을 많이 보고 있다. 실업급여, 학생 장학금, 등등. 정부의 사회적 분배 기능을 통한 최소한의 경제적 수입이 없었다면 그들은 이 액티비즘을 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 사회복지의 혜택을 통해 기후 위기에 의해 고통받는 다른 생물종의 목소리를 대신 내어줄 시공간을 가지고, 그 실천은 이 사회의 구석구석에 퍼포먼스로, 워크숍으로, 다양한 언어와 움직임으로 침투한다. 국가의 복지 제도가 만들어 놓은 틈에서 존재하며, 국가의 선택에 저항하는 기후 액티비즘. 각자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돈을 벌러 국가와 기업 안에 들어가서 영양분을 채우고 다시 나타나 반란을 도모한다. 한 예로, 비커밍 스피시스는 코펜하겐 시가 추진하고 있는 아마 펠러의 주택건설에 반대하는 운동에 동조해왔다. 그런데 그 코펜하겐 시의 소속 기관 중 하나인 이슬란드 브루게의 문화의 집에서 비커밍 스피시스의 퍼포먼스와 워크샵, 스피시스 앰버서더의 전시를 의뢰하였다. 정부가 정부에 의해서 부정된 상황이랄까. 또 전혀 만날 것 같지 않았던 사회의 행위자들, 공무원과 액티비스트가 협업을 하는 배치가 형성된 새로운 앙상블라주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틈을 더 만들어달라고, 정부를 향해, 기업을 향해, 인프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각종 기관을 향해 요구하는 것을 상상한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말할 수 있는 공간, 교육, 문화활동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하나의 커다란 주름이 잡히듯이, 역으로 정부와 기업의 한 제도로 편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의 약탈적 기업을 적으로 싸우기보다 동맹을 맺어, 그들 안에 균열이 생기도록, 점점 다른 모습이 되도록 오염시키고, 변화시키기.


(위와 관련해, 냉전 이후, 히피 운동과 그린피스 등이 어떻게 좌파 정치의 중심이 되었는지, 어떻게 그들과 다르게, 계속해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생성해내는 서사와 그룹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    


인포마숑Information신문에 실린 익스팅션 리벨리온의 기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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