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n Feb 09. 2022

우리는 자연 물질들에 다가갈 수 있다.

신유물론 강의 후기 3

신유물론 입문자로, 인상적이었던 단어/문장들을 제 상황과 실천에 대어보며 이해해가고 있습니다.  

(페이지 사진: Ole V. Wagner, 아마 펠러 공원을 보호하기 위한 생물들의 행렬 중, 시청 앞에서)


세 번째 강의를 들으면서 현재 코펜하겐에서 기후 운동을 하는 그룹들과 그들의 활동이 어떤 예로써 연결이 되었다. 나는 코펜하겐에서 ‘익스팅션 리벨리온 덴마크 Extinction Rebellion Denmark’의 몇 액티비스트들과 함께 ‘비커밍 스피시스 Becoming Species’라는 퍼포먼스 액티비즘 콜렉티브 Performance Activism Collective로 기후와 생물다양성 운동에 (저만 느슨하게) 참여하고 있다. 기존의 시위와 다르게 시적이고 퍼포먼스적인 요소를 가져와서 대중과 매스컴의 주목을 받아 우리의 매니페스토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고, 또 정치적 실천이 시급한 시대에 예술 + 액티비즘 = 악티비즘을 실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커밍 스피시스 즉 생물종 되기. 내 동료가 지은 이 이름 자체도 최근의 철학 트렌드 Becoming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하다.

            세 번째 강의에서, 강사님께서 브루노 라투르의 사물들의 의회가 정말 생물들을 그 의회에 데려놓는 것은 아니라는 농담을 하셨다. 그때, 후기 인류세 철학/미학의 영향을 받은 기후 운동 그룹들이 이러한 이론의 1차원적인, 직접적 재현을 하는 예들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현재 코펜하겐에서는 시 내의 유일한 야생 자연공원에 아파트를 건설하는 문제를 두고 시민과 시의회/건설회사가 오래 시비를 벌이고 있다. 그 운동의 주축이 되는 시민단체들의 이름이 ‘아마 펠러(야생 자연공원의 이름)의 친구들’, ‘생물종의 대사(Ambassador of Species)’이다. ‘생물종의 대사’와 ‘생물종 되기’ 그룹의 경우 한 사람마다 자신이 대표하는 생물종이 있다. 그 생물종의 특성에 관해 책으로 읽고, 관찰하고, 움직임을 따라 하는 등, 과학적인 동시에 시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그 생물종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실제로 몇 천명의 시민들이 아마 펠러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시청 앞까지 행렬을 했었고, 환경부 건물 앞과 로비를 주택건설로 주거지를 잃은 살라만다로 변신한 사람들이 뒤덮기도 했다. 또 시의회, 정치인, 건설 회사 간부들만이 모여 이 건설의 찬반 회의를 할 때, 보통 시민들과 생물종들이 제외된 것을 풍자해, 생물종들의 온라인 회의를 동시에 진행하기도 했다.

사진: Asbjørn Sand, 아마 펠러 공원을 보호하기 위한 생물들의 행렬 중


            브루노 라투르 식의 사물들의 정치 혹은 의회의 또 다른 예들이 더 떠오른다. 오스트레일리아였나? 자연환경을 위해서 운동을 하다가 법에 어긋난 행위를 한 것은 위법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최근 오스트리아의 환경부는 교통건설부의 새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를 환경과 기후 문제 해결에 어긋난다고 무효로 만들었다. 또 코펜하겐 시가 인정한 건설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생물종의 대사’와 ‘생물종 되기’ 그룹을 코펜하겐 시 말단의 문화의 집에서 관련 주제에 관한 전시와 워크숍을 열 수 있게 초대했다. 이 예들 모두 정부가 정부 스스로를 부정하는 신선한 행위이자 정부의 공무원과 액티비스트가 만나는, 전혀 만날 것 같지 않았던 사회의 행위자들이 만나게 된 새로운 앙상블라주라고 여겨졌다.  2강 강의에서 ‘신유물론이 필연성과 우발성의 선후관계를 피한다’, ‘1. 우발성을 통해 필요성 도출 vs. 2. 필연성과 만나면서 우발성의 생성’에 대해 강사님께서 물음표를 남기고 넘어가셨던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저의 비약과 곡해일 수 있지만) 정부와 기후 활동가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2의 예로 떠올랐다. 정부기관과 관료라는 안정화되고 범주화된 것이 한번도 연결되지 않았던 존재들과의 우발적인 만남을 통해 생성될 수 있는 것. 물론 반대되는 예, 68 혁명 이후 안정화된 권력을 얻은 좌파와 환경단체의 겉치레일뿐이된 기후 내러티브들이 최근 환경 관련 다큐에 의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결국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사진: Ole V. Wagner, 아마 펠러 공원을 보호하기 위한 생물들의 행렬 중




 이렇게 생물종의 모습을 모방하는 활동들을 하면서 여러 반성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행위들이 아이들의 유치한 놀이 같거나, 학예발표회 같다고 스스로 느끼기도 한다. 나는 그 생물종의 마스크를 쓴 상태에서 제대로 집중도, 트랜스 의식상태가 되지도 않고 영원히 그 생물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라도 한번 시도해본다고 이야기한다. 그 생물종이 겪는 어려움을 대신해서 우리 인간의 목소리로 대신 말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인간 중심으로, 인간의 감정으로, 나라는 인간의 가치를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모순을 느끼기도 한다. 


정신도, 의식도 물질적 과정이다.
자연 물질들에 대한 인간의 접근 가능성을 전제한다.
우리는 사물들의 현상만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 접근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던 차에 이 강의에서 (스피노자, 브루노 라투르적 관점으로) ‘우리는 그 대상(을 인간주의적으로 환원하지 않고서도)에 접근할 수 있다, 다가갈 수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위안을 받았다. 그에 더해서 인간의 정신활동, 이성적인 구성, 인간주의적 감정의 표현이 진부하게 느껴져 왔는 동시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신과 의식도 다 자연적, 물질적 과정이라는 내용에서 커다란 긍정성과 포용성을 느꼈다. 특히 예술/무용 작업을 할 때, 이것도 저것도 다 인간 중심적인, 이성적인 표현이라고 제외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이 모든 것을  물질적 과정으로 인정하면 무엇이든 시도를 할 수 있고 따라서 그 안의 미시적인 것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반대로 이렇게 급격하게 시적 예술적 표현을 액티비즘에 도입한 것, 근대적인 공연미학의 의인화, 은유, 해학의 방법론을 반성없이 가져온 것의 문제점도 생각한다. 그 사물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긍정성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근대 공연미학의 이분항이 남아있는 표현과 방법론(예를 들어 감정적 표현에 대한 본질주의, 배우와 관객의 이분항 등) 을 급하게 가져와서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그 접근 가능성을 오히려 방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카렌 버나드의 퍼포머티비티 관련 글을 읽으면서 근래에 다시 생각하지도 했다. 어쩌면 근대적 형식, 재현의 형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A라는 기호가 A라는 의미나 본질을 100%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본질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있다면. 그 재현은 어쩌면 우리가 관계적 존재이며 그로인한 다의성, 모호성을 함유할 수 있지 않을까? 전통 공연미학에서는 '배우/퍼포머'가 '~역할'을 연기하거나 느끼는 것은 '타자인 관객'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자체는 굉장히 순수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나 애니미즘에서 가지고 있는 법한. 근대 미학이 입혀진 전통 공연 미학이 딱딱해 보이는 것은, 관객이 배우를 느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배우가 그 역할의 본질을 100% 담고 있다는 환상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오히려 배우나 퍼포머가 어느 존재가 되는 것과 자기 자신 사이에서 간행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재현은 본질주의적이지 않지 않을까. 



2와 3강에서는 SF를 염두에 둔 스토리텔링과 회절적인 재독해를  세계(상)화의 가능성으로 간간히 설명해주셨다. 신유물론자들이 고대철학의 텍스트를 재독해하는 모습. 21세기에 생물종의 마스크를 쓰는 이들이 생물종을 수호동물로 지닌 인디언들이나 애미니즘적 사고를 다시 기억해내는 것과 겹쳐 보인다. 고대 신화를 다시 읽는 행위들은 계속 진행되어왔었는데, 어떻게 새롭게 회절의 독해를 할 수 있는지가 숙제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유물론, 국소적인 정체성 정치를 인정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