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극장과 공공장소
어느 덴마크 안무가가 나에게 무용공연 작업과 기후 운동 퍼포먼스 작업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질문한 적이 있다. 근래에는 코펜하겐 예술대학 오이쿠스 OIKUS 콘퍼런스에서 비커밍 스피시스의 발표 후, 한 작가가 비커밍스피시스가 자신의 예술적 방법론을 여타 예술가처럼 저작권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오픈 소스로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 두 질문을 통해 나의 개인 안무작업을 할 때와 비커밍 스피시스 콜렉티브의 기후 운동 퍼포먼스에 참여할 때, 그 중간에서 경험했던 느낌과 생각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이 글로 정리해본다.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안무 환경과 기후 운동 환경이 있겠지만 내가 바탕을 두고 있었던 어느 특수한, 제한적인 안무환경과 기후 운동 환경에서 나온 비교라는 것을 밝혀둔다.
극장과 공공장소 사이에서
예술가와 그의 가족을 모두 레지던시에 초대하여, 예술가가 아이와 함께 작업을 할 수 있게 하는 BIRCA 키즈 레지던시의 첫 미팅 때, 이 레지던시를 기획한 덴마크 안무가 무My에게 위의 질문을 받았다. 내가 직관적으로 내뱉은 대답은 ‘기후 운동 퍼포먼스는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 아기를 데려가기도 편했고, 누구나 지나가면서 돈을 내지 않고 볼 수 있었어.’. 정말 그러했다. 기후 퍼포먼스는 주로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떤 존재든 지나가다 보고 가기를 결정할 수 있었다. 이는 내가 2~5세 유아를 데리고 기후운동을 다녔던 어머니라는 특성 때문에 더 잘 느꼈다.
아이를 데리고 보고 싶었던 극장 공연을 보러 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근현대 극장 공간의 배제성이 상대적으로 더 느껴졌다. 어떤 신체 조건으로는 통과할 수 없는 건축적인 벽, 어떤 경제적 위치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금전적인 벽, 연령에 의해 제한되는 벽 등. 근래에 다양한 배리어 프리를 시도한 공연들이 감사하게도 생겨나고 있다. 또 점점 아기, 유아 등의 특수한 연령층을 고려한 공연도 생겨나고 있는데 장단점이 있겠지만 예술가 엄마 입장에서는 이것이 또 다른 벽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어른들이 공연을 보는 동안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공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 어른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지워나간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아기나 유아를 데리고 어른들을 위한 공연에 들어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고, 함부르크 레지던시에 있는 동안 써머 페스티벌 공연에 아이를 데리고 (아이는 티켓 없이) 들어갈 수는 있었다. 그렇게 하는 다른 부모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소리를 낼 때마다 주변에서 돌아보는 시선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지난 해 완도에서 미역과 다시마 양식을 하는 할머니들을 인터뷰하면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른들이 다시마 수확해서 일하고 있으면 아이들은 그 옆에서 놀았지. 나중에는 도와주기도 하고."
마을 어른들의 노동 공간 옆에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고, 자연스럽게 사회적 예의와 공동체 속 역할을 배워나가는 공동공간이 사라져간다. 어린이 공간으로 따로 분리될 수록 개별 가족이 돈을 부담해야하는 사유화가 일어나고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도시에서 점점 사라져간다.
그와 달리 누구나 오고 가는 공공장소에서의 기후 운동 퍼포먼스는 내 아이를 데려갈 수 있었고, 퍼포먼스 도중에 아이가 오고 갈 수 있었다. 어느 아이가 소리를 지르거나 우는 행위들이 퍼포먼스와 동시에 일어나는 현장성의 한 부분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벌였던 비커밍 스피시스 액션, 2020년 당시 2~3살 정도 된 나의 아들이 퍼포먼스 주변을 돌아다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