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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 Aug 22. 2021

덴마크 사람이 아니라 정부와 결혼했다. (1)

당찬 포부로 그동안의 경험을 털어 내리라 하며 이민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계속 마음속 한 구석에 머뭇거리게 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일 하고 있고

나의 선택으로 한국과 덴마크 두 국가에, 또 그 사이에 있다. (현재 비자 상태 상)

외국인과의 결혼으로 인해, 소중한 것들을 놓아야 했지만,

또 얻게 된 것들에 대해 배부른 자가 무슨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덴마크에서 사는 다른 한국인들이 계속 불평만 말하는 나 때문에 그들의 이미지에 피해를 본다고 생각할까라는 망상까지.

다른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서 신문과 책을 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덴마크 정부(특히 이민국) 덕분에 나는 이런 자격지심이 생겼다는 것.

수입이 높지 않고 따라서 세금을 많이 내지 않는 외국인이라는 자격지심.

누군가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나를 이들의 복지제도에 기생하는 기생충처럼 보는 걸까? 나는 정말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떳떳할 수 있을까? 이런 마음속 생각들.



사회의 내면화된 통제 vs. 국가의 직접적 관리


한국에서 20년을 살고 나서 한국 사회와 문화가 나를 구성해오는 것을 탈탈 벗고 털어내고 부숴내는 시간을 가졌다. 그에 20대를 다 할애했다. 내면화된 통제와 규율, 그로 인한 내상 없이 20대를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필요한 것에 신경을 덜 쓰고, 더 전문성을 쌓고, 나와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바로 집중할 수 있었을까.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고, 여성으로서, 어떤 외모로, 어떻게 행동하고, 뒤처지지 않고, 대학에 가고, 스펙을 쌓고, 그렇게 사회적으로 나를 모양 지어가는 것들이 가득 있었다. 지금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한국 어른들을 만나면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내적 통제를 느낀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나를 향한 직접적인 제재 혹은 문서화된 제재가 없었다. 실체가 없는 무겁게 짓누르는 의식 같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지 않고 나의 꿈을 위해서 달릴 때, 친구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진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정부가 나서서 ‘너는 왜 취업을 하지 않니?’ 묻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국이라는 국가가 ‘나’라는 국가의 인적자원을 관리한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하지 않았다.


반면 덴마크에서는 가족과 함께 있기 위해 가족 재결합 비자를 받는 ‘나’라는 외국인을 관리하고 감시했다. 이 관리와 감시는, 덴마크의 복지제도의 자원이 허투루 새어 흘러가지 않기 위한 방책일 것이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민자들을 감시하고 길 들이는 것보다, 그들이 스트레스받지 않고, 이 사회에 포용적으로 통합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가장 자원을 적게 쓰는 경제적 정책이 아닐까 요즘 많이 생각한다. 한 개인의 스트레스가 그들의 가족과 친적, 이웃과의 불화,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에.



국가가 나를 관리한다. 가볍게


국가가 나를 관리하는구나! 의 가벼운 케이스는 바로 '그들이 나의 석사를 관리한다.'

2016년 코펜하겐 대학의 석사에 입학 허가를 받았는데, 학생 비자가 개강 이후로도 몇 달 동안 나오지 않았다. 담당 교수와 내가 애가 타고 있을 때, 이민국에서 메일이 왔다. ‘한국에서 석사를 했는데 왜 여기서 다시 석사를 하는지 이유를 써서 보내라.’

내가 석사를 하나 하든, 두 개 하든 무슨 상관이지?

당시 덴마크는 석사를 마치면 약 몇 년간은 다시 덴마크에서 석사를 할 수 없는 법을 만들었다. 이런 법이 만들어진 이유는 결국, 무상교육인 대학원 교육에 투자하는 자금을 줄이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로 인한 결과는 개인의 교육을 받을 권리에 대한 통제.



두 번째 케이스는 '그들이 나의 예식을 관리한다', 즉 결혼이다.

국가와 시민이라는 개인이 암묵적으로 맺고 있는 ‘계약’이 처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사례가 나에게는 결혼이었다. (내가 나의 출생신고를 직접 하지 않았고, 프린랜서로 일했기 때문에 세금, 연금 등등으로 국가와 맺어지는 경험이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내가 결혼을 했는데 국가에 보고를 해야 한다. 이제껏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데  왜 국가가 그것을 알아야 하지?


한국과 덴마크 모두에 혼인 신고를 했다. 특히 덴마크에 혼인 신고를 한 것은, 이후에 가족 재결합 비자를 신청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인 이유가 크다. 결혼을 하지 않고, 파트너로 가족 비자를 신청할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하는 절차가 더 까다롭게 느껴졌다.


한국과 덴마크 혼인 신고에 다른 점이 있다. 그 다름은, 앞선 글에서 언급한, 유럽 국가들이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세속화되어 세속국가가 될 때, 함께 따라온 그리스도교 전통 정체성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공식적 결혼에는 두 가지 절차가 있다. 예식이라는 ‘의식’과 혼인신고라는 ‘법적 등록’.

한국의 경우 의식은 개인이 선택한다. 불교 예식, 유교 예식, 크리스천 예식, 서양식 예식 혹은 예식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의식’과 ‘법적 등록’은 분리가 되어있다.  보통 예식을 개인이 알아서 치르고, 등록은 따로 하러 간다. 과거에 의식이 종교나 전통문화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한국은 국가의 영역, 종교 및 전통의 영역이 분리되어있다.. (물론 근현대화되면서 예식이라는 의식에서 종교성과 공동체적 의식이 제거되면서 그 빈틈 사이로 상품화된 결혼이 팽배하고 있는 듯하다.)


반면에 덴마크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미리 시청에 신청서를 보낸다. 그 신청서에는 결혼 증명서(이중 결혼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출생신고서, 외국인의 경우 비자서류 등을 제출하다. 동시에 어느 교회에서 혹은 시청에서 언제 결혼할 것인지 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시청에서 ~날짜에 혼인을 하겠다는 입력을 하고, 우리는 그날 시청에 가서 혼인 서약을 했다. 이렇게 국가의 세속적 절차 안에 예식이라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혼 예식이라는 사적인 부분을 관리하는 국가. 공과 사를 분리하는 서구 모더니티. 그게 분리되지 않는 유럽의 결혼 절차. 이 모순들...  


( 무슬림들은 이 절차 내에서 어떻게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까 궁금해 찾아보았다. 이들은 모스크에서 이맘을 통해 결혼식을 올 릴 수 있고, 모스크가 여타 교회/시청과 같은 역할을 한다.

http://www.imamalimoske.dk/en/443/marriage/)


전통과 세속 절차가 애매하게 분리되지 않는 것은 결혼뿐만이 아니라 출생신고도 마찬가지다. 출생신고는 시청이 아닌, 국가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교회에서 세례 baptism를 받으면, 교회가 출생신고서를 주고, 시청으로 출생신고가 된다. 나의 아이가 신의 아이로, 그리고 국가의 아이로, 국가의 잠재적 인적자원이 되는 것이다.



아주 관리 제대로! 가족 재결합 비자  Family Reunification Visa


덴마크의 이민정책이 내 삶의 가치를 흔들며 ‘외국인 기생충’이라는 자격지심을 선물해 준 본격적인 시작은 바로 가족 재결합 비자를 준비하면서부터다. 덴마크인과 연인관계로 지낼 때 지인들이 우리에게 가족 재결합 비자의 높은 벽에 대해서 말해주기 시작했다. 덴마크에서 그것을 신청하기가 꽤 어려우니, 차라리 가까운 스웨덴 말뫼에 가서 살다가 유럽 법 아래에서 가족 재결합 비자를 신청하라는 조언이었다. 그게 그렇게 어렵다는 두려움에 나와 파트너는 계속 그 신청을 미뤘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첫 아이를 돌보며 정신없을 때, 집으로 방문하는 아기 간호사가 우리 사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어려움, 체류의 비 안정된 상황 등이 출산 후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고 안정된 환경이 되도록 돌보라고 조언했다. 아기를 안고 잠 못 자고 정신없던 몇 개월이 지나고 아기가 잘 자랄 무렵, 우리는 뒤늦게 가족 재결합 비자 신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2017년 8월, 가족 재결합 비자 신청 디포짓이 두배로 올랐다. 7월에서 8월로 바뀌는 순간, 천만 원이 이천만 원이 되었다. 흠. 이천만 원이 없는, 또는 빌릴 수 없는 덴마크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그다음 난관,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항을 만족시켜야 했다.   

     덴마크어 구사능력, 2. 고등 교육 정도, 3. 업무 경력에서 최소 3년간 풀타임으로 일하거나, 4. 임금을  얼마 이상 받았는지 증명해야 했다.    


덴마크에 오기 전 나는 한국에서 무용 공연을 만드는 안무가이자 교육자로 바쁘게 살아왔다. 공연 기금에 지원하고, 공연을 만들고, 스텝들을 꾸리고, 정산을 하고, 틈틈이 학교에 가서 강의와 수업을 하고.

그렇게 열정 페이와 청춘 에너지로 달렸던 나의 10여 년이 이 서류에 끼워 맞춰지지가 않았다. 동료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리서치하고, 질문하고, 고민하며 만들었던 공연 작업들은, 계약서도, 임금 증명서도 없었다. 그것들은 임금과 노동시간이라는 숫자로 환산된 적이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국립무용단과 국립현대무용단 작업의 경우 계약서가 있다고 해도, 계약 기간과 노동 시간이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다. 공연 날짜만 적혀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3개월 계약기간이라고 해도 그 사전 리서치 시간이 포함되지 않는다. )


이민국의 서류 조항에 노매드 아티스트의 야생적 삶과 노동은 들어맞지 않았다. 나의 지난 10여 년 간의 노동을 증명할 수가 없고, 게다가 임신, 영유아의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까지.

남녀평등하게 일하며, 여성에게 10개월 육아휴직을 주는 복지 천국 덴마크의 뛰어난 사회복지는 풀타임 고용직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먼 그림이었고, 이민과 육아로 인해 앞으로 계속될 경력 단절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한 순간  내가 잘못 선택해서 그동안 살아왔다는 자존감의 상실을 느꼈다. 그리고 곧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과 가치를 존중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내가 왜 예술작업을 하기로 했던 걸까? 옛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아주 어렸을 때 하고 싶었지만 (전형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로 할 수 없었던 무용. 패션 전공으로 대학에 가서 타전 공생으로 무용학 복수전공을 하였다. 그와 동시에 예술 관련 교양과목들, 또 철학과, 미학과 수업들을 들으며 나는 그때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눈을 뜨고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패션 산업, 무용, 그리고 나의 삶의 가치 사이에서 고민하며 헤매던 시절. 아마 그때 그 철학과 교수님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안무가로 활동하지 못했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결정과 가치와 시간들이 가족 재결합 비자 신청서 앞에서 무너져 내리다니.

국가의 서류라는 것이 이렇게 임금과 노동시간이라는 수치로 한 사람을 측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덴마크만도 아니고, 다른 국가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 각각이 다르게 생기고 생각하고 다른 능력과 재능으로 살고 있을 터인데, 어떤 조건에서도 일치하며 예외가 존재해선 안 되는, 한 가지 측정기준에 따라야 하는 것. 그리고 그 기준이 한 시민을 자본주의 사회의 인적자원으로 환산하기에 적절한 것. 개별적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변할 수 없는, 한 개인이 사회와 다양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식을 담을 수 없는 지금 현대 법과 제도의 한계가 느껴졌다.


(다음 비자 신청 조건은 거주지. 이다음 편에.

덴마크 사람들을 만나며 느낀 이 사회의 긍정적인 이야기도 쓰고 싶었는데, 그것은 좀 더 징징거린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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