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못 된 여행 23 : 어떻게 해야 할지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굳이 권하지 않겠다.
하지만 특별한 여행임은 분명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전의 삶과 비교할 수도 없거니와 이후의 삶에서 교정할 수도 없다.
(중략)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 최초로, 준비 없이 체험한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핀란드 킬로파에서 오로라를 양껏 보고 나니 한가로워졌다. (북유럽에서 유일하게 현금만 받는) hop on/off 버스를 타고 킬로파 시내에 있는 슈퍼 마켓으로 가는 길이었다. 박풀고갱이 헬싱키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기와 파리에서 카타르로 간 뒤 한국으로 가는 귀국행 비행기를 취소하자고 했다. 오로라에 투자한 시간 때문에 당초 계획이었던 파리에 사는 후배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럼 어쩌자고?
박풀고갱은 헬싱키에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그리고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자고 했다.
그렇다. 보통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작하는 러시아 횡단 열차를 거슬러 가자는 거다.
심장이 두근댔다. 비행기 취소 수수료가 아까워서... ㅎㅎㅎ
이렇게 되면 카타르 환승 시간 동안 하기로 한 사막 투어까지 취소해야 한다.
킬로파의 숙소 식당에서 반나절을 투자해 러시아 횡단 열차를 예약했다. 우선 헬싱키에서 모스크바,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는 1등석으로, 이르쿠츠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는 3등석으로 예약했다(러시아 횡단 열차의 등급을 골고루 맛보되 어중띤 느낌의 2등석을 제낌). 블라디보스톡에서 한국까지는 배편을 알아봤지만 없어서 비행기로 예약했다. 남는 시간 동안에는 러시아의 알파벳인 키릴 문자를 외웠다(지금은 물론 다 까먹었다).
이 여행을 시작할 때 기내용 캐리어 2개에 짐을 쌌기에 여행 내내 '캐리어를 하나 사? 말아?'로 고민했다. 여행 짐은 점점 늘어나고 면세로 주류를 구입하는 쇼핑 스타일이라 어차피 수화물을 부쳐야 하는데, 기내용 캐리어를 고집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때 이후로 가방은 큰 걸 들고 다닌다.
어쨌든 캐리어는 새로 사지 않았지만 횡단 열차를 타려면 슬리퍼가 있어야 할 거 같았다. 헬싱키 시내에서 슬리퍼 계의 명품인 크록스를 샀다. 마침 1개를 구입하면 나머지 1개는 50% 할인하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직원은 친절하게 면세가 된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기차로 러시아에 갈 거라 세금을 돌려받을 수 없을 거라고 했더니, 기차 안에서 돌려받을 수 있다며 면세 서류를 내밀었다. 소 스위트!!
핀란드 헬싱키에서 러시아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타는데 차장들이 뒷짐을 지고 열차문 앞에 서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주눅이 들어서 얼른 탔다.
1등석이라 테이블에 무료 간식과 음료가 기분 좋게 우리를 맞이했다. 크록스 직원의 말대로 열차 안에서 면세 금액을 차장에게 돌려받았고, 아까 열차 앞을 무섭게 지키던 그 차장은 의외로 엄청 친절했다.
문제는 국경을 넘을 때였다. 러시아 쪽 사람들이 기차로 올라와서 여권과 짐 검사를 한다. 러시아의 출입국 직원 두 사람이 캐리어를 다 열어보게 하고 여권의 사진과 우리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살벌하게 굴었다. 출입국 심사 직원은 내 여권 사진과 실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납득할 수 없어하는 것 같았다. 지난 5년간 몸무게가 10 kg 정도 불었지만 그렇게 다른가? 너무하네... 어쩔 수 없지. 제스처를 섞어 가며 살이 쪘음을 시인했다. 나의 제스처 때문인지 말투 때문인지 출입국 직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 덕분에 무사히 통과했다.
헬싱키에서 모스크바까지는 나름 국제선이라 그런지 기대했던 러시아 횡단 열차의 시그니처인 '물통'이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탔을 때에야 비로소 그 물통을 알현할 수 있었다. 뜨거운 물을 무료로 항시 받을 수 있는 물통을 보자 괜히 반가웠다. 열차를 타기 전에 미리 사둔 도시락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아 보았는데 '엄훠나!' 절절 끓는 물이 나왔다. (화상주의!)
러시아에서 한국의 도시락 컵라면과 초코파이의 인기는 실로 놀라울 정도라고 하는데 슈퍼에 가면 그것이 사실임이 확인하게 된다. 가보면 안다.
열차 안에서 음주는 금지되어 있지만 1등 칸이라 프라이빗한 공간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에 주섬주섬 맥주를 꺼내 미리 다운로드하여 둔 한국 프로그램을 보며 홀짝였다.
중간중간 서는 정차역의 도착시간과 정차 시간은 러시아 철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흡연자였던 박풀고갱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정보였기에 미리 확인해 뒀다.
재밌는 점은 모든 열차 시간은 점점 커지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시간 기준이라는 거다. 박풀고갱은 시계에 모스크바 시간과 현재 위치의 시간을 함께 표시해 두고 열차 시간을 확인했다. 시차를 뚫고 여행한다는 점이 재밌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니까 시간을 점점 잃어버리게 된다. 역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한다면 과거로 가는 셈이 된다.
담배가 아니더라도 중간 정차역에 내려 스트레칭도 하고 간식거리나 물과 맥주 등 생필품을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열차가 언제 정차하는지 꼭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간이역 플랫폼에서 보따리 장사꾼들이 찐 감자나 직접 만든 만두, 빵을 팔기도 한다. 참! 러시아에서 물을 살 때는 꼭 "No gas!"라고 콩글리쉬를 외쳐야 한다. 탄산수가 디폴트 값이라서 물을 달라고 하면 탄산수를 준다. 탄산수를 즐기는 편이지만 기호 식품이지 갈증을 해소하기엔 왠지 부족했기에 꼭 "노 가스"라고 하며 물을 샀다.
끼니는 열차의 식당칸에서 사 먹거나 컵라면으로 때웠다. 뜨거운 물은 항상 구할 수 있었기에 미리 구입해 온 콩을 갈아 커피도 내려 먹었다.
이르쿠츠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는 3등 칸을 탔는데, 2층에서 자는 것이 불편할 거 같아서 모두 1층으로 예약했다. 3등 칸은 일단 사람이 너무 많았다. 프라이빗한 공간도 당연 없다. 그래서 보드카를 주스통에 넣어 몰래 마셨다. 차장이 술 마시는 것을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금지되어 있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을 함께 이용할 사람 수도 훨씬 많다.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도 화장실을 오래 점유하기가 부담스러워서 급성 변비가 왔다. 이때부터 여행 짐에 변비약이 추가되었지.
씻는 건 어떻게 하냐고? 화장실에 세면대가 딸려 있다. 꼭 씻고 싶다면 씻으시라. 우리 두 사람 모두 내릴 때까지 고양이 세수만 했다.
처음 횡단 열차를 타기로 했을 때 로망이 있었다. 같은 칸을 탄 러시아 인과 음식과 술을 나눠 먹고 통하지 않는 언어로 손짓발짓 소통하고 어울리는 즐거운 상상, "이게 여행이지!!!"라는 느낌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탄 칸에는 군인들이 대거 탔다. 여드름이 쏭쏭 난 그들은 그들끼리 어울렸다.
목적지까지 하는 일은 자고 일어나 창밖 구경을 하고, 주전부리를 씹거나 멍을 때릴 일밖에 없었다. 럭셔리하지 뭔가.
러시아 현지인들은 해바라기 씨를 그렇게 먹어 댔다. 우리도 시도해 보기 위해 한 봉지를 샀으나 그 작은 씨앗의 껍질을 앞니로 벗겨 속살을 꺼내 먹기가 쉽지 않았다. 해바라기 씨앗 껍질을 벗기며 자신 앞에 펼쳐진 엄청난 시간의 부피와 길이를 견디는 러시아인들의 지혜를 단번에 따라잡기란 역시 무리였다.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은 하지 않았기에 드디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너무나도 피곤했다. 새벽이라 에어비엔비로 예약한 숙소에 들어가기까지 또 7시간 여를 죽쳐야 했다. 역을 빠져나오는데 숙소 홍보 배너들이 서 있다. 그때 싼 숙소 아무 곳이나 골라 좀 잤어야 했다.
기나긴 시간 기차를 타고 와서 블라디보스톡 시내 관광을 했더니 몸에 무리가 왔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사흘 전 내가 먼저 감기 몸살에 걸렸고, 이어 박풀고갱에게 넘어갔다. 박풀고갱은 그 좋아하는 면세점 쇼핑도 마다할 정도로 호되게 앓았다.
아무튼 우리는 횡단을 해냈다. 진귀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