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riosa: A Mad Max Saga, 2024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 주인공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의 대사는 30줄이 안 된다. 주인공도 입을 다문 세상. 사색을 위한 은유와 비유는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구호와 명령만 남는다. 사물은 그저 용도로 지칭된다. 피주머니, 씨받이, 가스타운, 무기농장 등. 핵전쟁 이후로 책이 불타버린 세계의 냉혹한 알고리즘이다. 떠벌이 디멘터스는 규격 외지만 주름지고 깡마른 히스토리맨들이 문신으로 새길 수 있는 만큼의 말 그대로 ‘육체의 언어’만 매드맥스의 앙상한 세계를 지탱한다.
육체의 언어로 가득한 세계에 관객들도 말을 잃었다. 블루스크린에서 허공을 보며 연기하는 현장에서는 잡아챌 수 없는 에너지가 언어를 대신한다. 나미비아 사막에서 누런 먼지를 일으키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차와 오토바이가 부딪치고, 사방에서 폭탄이 터지고 기타는 불을 뿜고, 장대를 탄 인간이 날아다닌 위험천만한 세계에서 안전을 위해 착용한 피아노 줄을 지우는데 가장 많은 CG가 사용됐다고 한다.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덧대며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기보다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게 드러내기 위한 결단이 매 순간 펼쳐진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맥스가 무기상인을 박살 내는 순간을 과감히 생략한 것이다. 워보이의 피주머니가 되어 자동차 앞에 메이느라 제대로 활약할 시간이 없던 맥스가 단독으로 무용을 뽐낼 순간이었지만 영화에서는 뿌연 안개 속에서 터지는 폭발 하나로 요약됐다. 맥스는 총과 폭탄을 든든하게 전리품으로 챙겨왔지만 호들갑을 떠는 대신 다른 사람의 피가 묻은 얼굴을 우유로 씻어내고 다시 트럭에 탄다. 말은 줄이되 행동을 늘린 ‘생략의 미학’이 <분노의 도로>를 21세기 최고의 액션영화 반열에 올렸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퓨리오사가 임모탄이 신뢰하는 장군이 되는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리라 예상했지만, 생략의 미학이라는 범주 내에서는 용납되지 않을 항목이다. 조지 밀러 감독은 임모탄과 디멘터스가 전면전을 치르며 가장 격렬한 액션을 뽑아낼 수 있을 아이템인 ‘사막의 40일 전쟁’조차 짧은 몽타주로만 처리했다. 퓨리오사는 전공을 쌓을 계기조차 없이 이미 전황이 결정되어 임모탄에 패배한 디멘터스가 꽁무니를 빼는 와중에 참전해 그를 맹렬히 추적한다.
이처럼 <퓨리오사>는 의도적으로 퓨리오사의 성공 신화를 우회한다. 연출적으로 생략의 미학을 부각하려는 연장선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퓨리오사가 임모탄의 영웅이 될수록 주제 의식과는 멀어지는 탓이다. 퓨리오사의 목적은 어머니를 죽인 디멘터스(크리스 헴스워스)에 대한 복수와 녹색의 땅으로의 귀환이지 시타델에서의 출세가 아니다. 전공을 쌓고 인정받으며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납치된 후 장장 7,000일을 헤아리며 간절히 구원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 신화를 피하는 결정은 관객을 구원하기도 한다. 실제로 농반진반 임모탄을 추앙하는 의견도 보인다. 무법지대에서 시타델, 무기농장, 가스타운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참 경영인이자 동시에 근본 없는 퓨리오사를 장군으로 중용하는 눈 좋은 관리자라는 말이다. 자원독점, 여성과 청년의 대상화와 착취, 폭력을 앞세운 가혹한 통치가 벌어지는 지옥 같은 환경을 직시했는지는 의문이다. 만약 디멘터스와 임모탄의 대결에서 퓨리오사가 의도치 않은 활약을 했다면 총지휘관인 임모탄을 숭배하는 더 많은 워보이가 현실에서 양성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퓨리오사는 어떻게 통쾌한 승리 없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바로 외면하지 않는 용기다. 풍요로운 녹색에 땅에서 평화롭게 과일을 따던 어린 퓨리오사는 침입자를 발견한다. 함께 있던 친구의 말처럼 그대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녹색의 땅이 노출되면 안 된다는 판단에 그들의 오토바이를 고장 내다가 납치된다. 납치된 퓨리오사를 구해내지만 결국 디멘터스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한 엄마는 퓨리오사에게 도망치라고 망한다. 그러나 퓨리오사는 다시 돌아와 끔찍한 마지막을 지켜보며 엄마의 곁을 지킨다. 무기농장에서도 디멘터스의 함정에 갇힌 잭을 외면하지 않고 돌아와 협공하며 디멘터스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분노의 도로>에서 최고의 순간은 퓨리오사와 다섯 아내가 임모탄의 추격을 성공적으로 뿌리치고 소금사막을 향해 내달리는 대신 다시 적들이 우글거리는 퓨리로드를 뚫고 시타델로 향하겠다며 전투 트럭의 핸들을 꺾는 순간이었다. 누구보다 녹색의 땅을 그리워하고 시타델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이 퓨리오사라는 게 본작을 통해 확실히 드러난 만큼 숭고하고 용기 있는 결정의 순간이 다시 부각된다. 이는 맥스의 조언을 경청하며 동시에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고 시타델의 현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한 전략가의 면모도 있었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대의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돌파하는 기질의 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영화에서 중요한 남성은 세 명이 나온다. 한 명은 그녀를 납치하고 ‘리틀 D’라고 부르며 세계의 잔혹함을 알려준 디멘터스, 건강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디멘터스와 거래한 임모탄이다. 앞의 둘은 퓨리오사의 자유를 빼앗는 대신 안락한 생존환경을 보장하며 그녀를 주저앉히려 한다. 희망에 관한 가치관도 다르다. 디멘터스는 이 세계에 희망이란 없다고 단정하며 파괴를 일삼고, 임모탄은 자신이 세계를 구원할 희망이라고 오도한다.
근위대장 잭은 퓨리오사를 전우이자 친구로 대한다. 올바른 가치를 추구한 부모님을 두었던 잭은 그녀가 시타델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운전, 기계정비, 전투법 등을 알려준다. 디멘터스의 함정에 빠진 순간에도 그녀가 녹색의 땅으로 갈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한다. 선한 인물이지만 그 역시 퓨리오사의 나침반은 되지 못한다. 미쳐버린 세상에서 희망을 찾기에 그의 마음이 너무 지쳐버린 탓이다. 세 남성에게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퓨리오사의 마음은 스스로에게로 향한다. 장장 15년 동안 불태워온 분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이 퓨리오사의 캐릭터를 완성한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퓨리오사에게 붙잡힌 디멘터스는 자신도 억울하게 가족을 잃었다고 고백한다. 그로 인한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는 건 핑계 아닌 핑계지만 어느 정도 진실이기도 할 것이다. 잭을 오토바이에 묶어 끌고 다니며 개들이 물어뜯어 죽는 것만 기다리다가도 권태에 빠져버린 게 디멘터스다. 퓨리오사는 그가 어머니와 자신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길 원한다. 하지만 디멘터스는 너의 복수가 끝나도 희망은 절대로 찾을 수 없고 증오만 남은 삶을 살게 될 거란 저주와 조롱으로 받아친다.
플래시백 등의 효과가 쓰이지 않는 영화이지만 이 순간만은 내레이션과 함께 갑자기 상상의 숏이 시작된다. 뒤통수에 총구를 대고 무심히 발포하기도, 엄마가 당한 것처럼 잔인한 고문을 하기도, 잭이 당했던 것처럼 자동차에 묶어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니는 장면도 있다. 어떤 선택이라도 설득력을 갖는다. 특이한 건 두 사람이 마지막 대화를 하는 곳은 어쩐지 초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사막의 모래폭풍과는 다른 뿌연 안개가 끼어있다. 시간도 알 수 없고 사방이 흐릿한 미지의 공간은 선택의 기로에 선 퓨리오사의 내면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곳이다.
“희망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분노의 도로>에서 엔딩크레딧 전에 나오는 물음이다. 개봉 순으로 영화를 본다면 질문 뒤에 퓨리오사의 등장 장면이 나온다. 관객에게 던졌던 결국 질문은 곧 퓨리오사에게도 던져진다. 퓨리오사는 희망의 부정하지도, 오도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며 제3의 길을 선택한다. 그녀는 녹색의 땅에서부터 고이 간직해온 연약한 씨앗 하나를 심는다. 척박한 환경에서 오래 지켜보며 관심을 가져야 할 연약한 생명이다. 분노를 담은 복수도 자양분이 된다. 그렇게 자라난 복숭아 한 알이 임모탄의 다섯 아내에게 전해지고 퓨리 로드(Fury Road)는 결국 퓨리오사의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