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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Jul 22. 2024

<퍼펙트 데이즈> 허구는 인생에 형식을 부여한다

다음 중 진짜 광기는 누구인가. 첫 번째 후보. 맨날 여자랑 같이 죽겠다고 찔찔대며 아쿠카타와상 못 받았다고 심사위원에게 눈물의 읍소편지를 보낸 작가. 두 번째 후보. 밥 대신 두부 먹고 하루에 10km 달리며 1년에 한 번 풀마라톤을 뛰고 부업으로 번역하며 마감일 3일 전에 원고를 제출하는 작가. 첫 번째는 다자이 오사무. 두 번째는 무라카미 하루키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자신의 루틴을 철저히 지키는 하루키야말로 진짜 광기로 보인다.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도 하루키와 결이 비슷하다. 도쿄의 공공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기상하자마자 싱크대에서 양치하고 분무기로 화분에 물을 주고 작업복을 입고 나와 집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마시고 차에 탄 뒤 카세트테이프를 켠다. 그의 진짜 광기를 느낀 지점은 알람 없이 이웃집 할머니가 거리를 비질하는 소리에 한 번의 뒤척임 없이 번쩍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히라야마는 직접 제작한 청소장비들까지 활용해 가며 지저분한 공중화장실을 호텔 화장실로 탈바꿈시킨다. 점심은 우유와 샌드위치를 사서 공원에서 먹고 필름 카메라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찍는 것도 루틴의 하나. 퇴근 후의 삶도 한결같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목욕탕에서 씻고 지하철역의 선술집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는다. 집에 돌아와 이부자리를 편 뒤 스탠드를 켜놓고 문고판 책을 읽다가 취침. 그리고 반복. 하나도 거스르는 게 없는 완벽한 하루다.


히라야마의 완벽한 하루를 소개하는 긴 오프닝이 지나면 또다시 아침이 된다. 하지만 빔 벤더스 감독은 각도를 달리해 이 하루를 소개한다. 각도가 달라진다는 말은 말 그대로다. 싱크대에서 양치하는 카메라 앵글부터 다른 하루. 부침 없는 히라야마의 일상에 동료 다카시, 조카 니코, 선술집의 마마가 스며든다.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제 3자까지 합류하며 히라야마의 완벽한 하루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이들은 변화의 기점이기도 하지만 히라야마의 현재-과거-미래에 대한 압축으로도 보인다.



■ 히라야마의 과거-현재-미래


다카시는 지각한 주제에 핑계부터 늘어놓으며 등장한다. 변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건성건성 일하는 다카시는 소변기 하단을 거울로 비춰가며 닦는 히라야마에게 이 일을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까닭을 묻는다. 업무태도도 불량하면서 여자 친구인 유아를 일터에 데려오기도 한다. 다카시는 돈이 없으면 사랑도 할 수 없냐고 울부짖지만, 유아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으로 봤을 때 냉정하게 말해 돈이 많다고 연애도 잘할 거 같지는 않다.


그의 유일한 가치는 ‘귀’다. 학창 시절부터 친했다는 친구는 그의 귀를 만지는 버릇이 있다. 그런 친구에게 다카시는 진짜 친구가 ‘귀’고 나는 껍데기 아니냐며 농담을 던진다. 물리적 귀는 있지만 기능적인 귀는 없는 다카시의 상황을 정확히 포착한 말이다. 다카시에게 히라야마가 모은 카세트테이프는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는 중고품에 불과하다. 반면 여자 친구인 아야는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관심을 보인다.


다카시는 모든 일에 ‘10점 만점에 몇 점’이라는 말버릇이 있다. 그렇게 따지자면 본인은 최하점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이는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한편 계량화하기 어려운 3D 직종을 깔보고 직업의 귀천을 나누는 현대 사회와 닮아있다. 다카시는 화장실 청소에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히라야마의 태도와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동시에 단순히 개인 간의 비교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편견과 고독하게 투쟁하는 성실한 직업인에 대한 찬사로도 확장된다.



퇴근 후에 갑자기 집 앞에 나타난 조카 니코. 가출했다는 니코는 어딘가 히라야마와 닮았다. 새벽에 출근하는 히라야마는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움직이지만, 잠에서 깬 니코는 본인을 혼자 집에 놔두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고 협박하며 그를 따라나선다. 히라야마를 도와 청소도 하고 목욕탕에도 다녀온 니코. 음악에도 관심이 많고 책장에 쌓인 책을 꺼내읽기도 한다. 필름 카메라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스포티파이에도 테이프에 담긴 노래가 있냐고 묻는 니코에게 그게 어느 동네에 있는 레코드점이냐고 답하는 히라야마처럼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장벽이 있다. 가출한 니코를 찾으러 온 히라야마의 여동생은 아버지가 요양원에 있다며 만나보라고 한다. 니코는 삼촌과 있겠다지만 히라야마는 둘의 제안을 모두 거부한다. 결국 니코는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평범한 가족드라마였다면 해묵은 갈등이 해결됐겠지만 결국 변하는 것 없이 또 하루가 지난다.


히라야마는 니코에게 세상이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세상이 있다고 말한다. 답답한 엄마를 피해 가출한 니코는 가족과 연을 끊고 사는 과거의 히라야마와 비슷한 듯 보인다. 하지만 니코가 히라야마는 아니다. 함께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 해질녁 다리 위에서 다음이 뭐냐고 묻는 니코에게 히라야마는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고 답한다. 마치 다음 세대인 니코가 지금의 히라야마처럼 되지 않도록. 니코에게 그리고 본인에게 당부하듯 담담하게.


주말이 되면 비로소 히라야마의 시간이 흐른다. 주중에는 신발장 위에 보관했던 시계를 차고 나가 빨래방에서 밀린 세탁물을 돌린다. 그 사이에 주중에 찍어놓은 필름을 현상하고 잘 나온 사진을 골라 틴케이스에 보관한다. 늦은 오후가 되면 단골 선술집으로 향한다. 선술집에는 나이 먹은 주정뱅이를 상대하는 마마가 있다. 히라야마에게 변화를 요구하지 않으며 자신의 노래를 하는 사람이다.


영화의 제목이고 OST로도 쓰인 한 루 리드(Lou Reed)의 Perfect Day의 가사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당신과 공원에서 샹그리아를 마시고 동물원에 가고 영화도 보고
집으로 간 완벽한 날. 내가 누군지도 잊고 딴 사람이 된 기분이야.


올드팝 마니아인 히라야마의 차에서 처음으로 나온 곡은 애니멀스(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이다. 선술집의 마마는 기타 반주에 맞추어 Asakawa Maki의 버전으로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을 부른다. 카세트테이프 말고 내화면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퍼지는 음악인 그 노래는 같은 애니멀의 곡과 멜로디지만 마치 다른 곡인 것처럼 가사가 다르다. 히라야마는 지그시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이 된 기분으로 그녀의 노래를 감상한다.


우연히 만난 마마의 전남편은 자신이 말기암 환자라며 히라야마에게 그녀를 부탁한다. 히라야마는 자신은 단골일 뿐이라고 하지만 내심 싫지는 않은 듯 캔맥주를 나눈다. 그림자끼리 겹치면 어두워질까 예전부터 궁금했다는 전남편의 말에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림자를 겹쳐 보인다. 변한 게 없다는 전남편의 말에 히라야마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반박한다. 정말 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 곧 완벽한 과거가 될 마마의 전 남편, 마마를 보러 갈 때는 시간이 흐르게 시계를 차고 히라야마에게 중요한 건 뭐든 변한다는 믿음처럼 보인다.


■ 허구는 인생에 형식을 부여한다


<퍼펙트 데이즈>는 시부야구에 있는 17개의 공공화장실을 개축하고, 젠더를 불문하고 누구나 쾌적하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THE TOKYO TOILET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됐다. 전후 일본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담은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팬을 자처하는 빔 벤더스의 영향도 짙게 배어있다. 유유자적 보이는 히라야마의 모습에 일본적 미니멀리즘에 대한 지나친 미화라는 비판도 보인다.


일상의 요동 없어 보이는 히라야마지만 그는 자전거 하나도 열심히 타는 사람이다. 평지임에도 언덕을 올라가듯 온몸을 사용해서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집 안 청소라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점프슈트를 입고 쪼그려 앉아 바닥을 닦고 있는 게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니라는 걸. 삶에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다. 타카시가 갑자기 퇴사하고 그의 몫까지 일하느라 늦은 밤 퇴근했을 때 그는 사무실에 여러 차례 전화하며 강하게 충원을 요구했다. 목욕은커녕 책 한 줄도 읽지 못하고 바로 쓰러져 잠들기도 한다. 히라야마가 태평하게 소일거리로 정신 수양을 하는 게 아니라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지탱되는 노동으로 삶의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걸 빔 벤더스는 잊지 않는다.


따져보면 똑같은 하루는 없다. 어제와 같은 조명, 온도, 습도가 같은 오늘도 내일도 없다. 오프닝의 루틴을 선보인 완벽한 하루는 끝내 한 번도 재현되지 않는다. 완벽한 하루는 흘러간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걸까. 영화의 마지막. 출근길에 나선 히라야마는 평소처럼 테이프를 틀고 스카이트리를 바라본다. 도로를 채우기 시작한 자동차들. 아직 형광등이 켜지지 않은 건물 사이로 동이 터오고 해를 마주한 히라야마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카세트 데크를 통해서는 니나 시몬(Nina Simone)의 'Feeling Good'이 흐른다 .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It's a new life for me, I'm feeling good.
새로운 새벽. 새로운 날. 새로운 삶이야 내겐.


극작가 장 아누이는 “허구는 인생에 형식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기억은 온전히,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의 파편으로 삶을 추억한다면, 어떤 장면을 뽑아내 각자의 삶을 영화로 만들지는 결국 우리의 손에 달렸다. 장면은 많을수록 좋다. 우리에게 새로운 새벽, 새로운 날이 필요한 이유. 영화의 제목은 단수(Perfect Day)가 아니라 복수(Perfect Days) 이유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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