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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Dec 23. 2024

<서브스턴스> 당신도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했나요?

THE SUBSTANCE, 2024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장을 나오며 두 가지 생각을 했다. ‘개미친영화’라는 문구를 떠올린 홍보사 직원에게는 회사 차원에서 인센티브를 넉넉히 줘야 한다. 사실 두 번째가 더 중요하다. 왜 작중 ‘서브스턴스’는 구독료가 없을까. 허름한 슬럼가에 위치한다고 하지만 번듯한 보관소가 있고 무뚝뚝하고 큰 도움은 안 되지만 24시간 콜센터도 운영 중이다. 군더더기 없고 잘 디자인된 패키지는 무슨 돈으로 만들며. 젊음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품에 대한 연구비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무료 구독을 한다는 건 또 다른 목적이 있거나 구독료가 수익모델이 아니라는 말이다. <서브스턴스>의 오프닝 시퀀스는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를 배경으로 선보이는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의 압축된 일대기가 아니다. 계란노른자에 서브스턴스를 주입했을 때 또 다른 노른자가 하나 더 생성되는 일종의 시연이 영화의 첫 장면을 장식한다. 오프닝 이후 보는 영상은 어쩐지 운전면허 취득할 때 필수시청해야 하는 사고사례 영상 같아 보인다.


사고사례는 안정제가 없는 수(마거리 퀼리)가 집에서 쓰러지는 부분에서 끝이다. 3막부터는 사고사례가 아니라 영화의 영역이라고 할까. 마치 영화 제목처럼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화면에 크게 등장하는 것부터 영화적이다.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의 효능이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물리적 인과관계나 사회적 상식을 지키려 노력하던 이전과 달리 엘리자수 등장 이후는 과감하게 초현실의 세계로 급발진한다.


엔딩에서 충격받지 않은 관객은 드물 것 같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몰락의 떡밥을 곳곳에 흩뿌려놓고 엘리자베스가 어떻게, 얼마나, 처절하게 망가지는지 기대하게 설계됐다. 하지만 파멸을 짐작만 했지, 이렇게 비참하게 조롱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기까지 바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몰락한 스타의 좌절과 잘못된 판단. 새로운 스타의 탄생과 파멸의 과정을 어느샌가 유희로 즐기던 관객에게 감독은 피바다 냉수마찰을 선사한다.


■ 세련된 악취미의 오마주


<서브스턴스> 연출에서 눈에 띄는 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자장이다. <샤이닝>에서는 기하학적 패턴의 카페트가 깔린 주황색의 복도, 기이할 정도로 깔끔한 하얀 타일이 붙은 화장실, 피바다가 몰아치는 엘리베이터.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현실 세계를 뛰어넘는 스타게이트, 잊을 수 없는 오프닝을 완성하는 음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사용이 직접적으로 오마주 됐다. <서브스턴스>가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얻기 위해 겉핥기식으로 큐브릭 스타일을 빌려 쓰는 것만은 아니다.


두 영화는 큐브릭의 영화 중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담은 이례적인 작품이다. 극단적인 부감으로 낯선 환경에 던져진 잭의 가족을 성냥갑만하게 찍어내던가. 인간은 보이지도 않고 태양과 지구, 달이 일직선이 되는 천문학적 시선으로 시작한다. 이는 개인의 의지와 능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질서나 운명으로 귀결된다. 불가역적 흐름에 휘말린 개인은 폭력적인 기억이 깃든 귀신의 집에서 악령에 쓰이거나, 초월적 존재의 부름에 맞서 초지능과 사투를 벌인다.


<서브스턴스>는 호러와 그로테스크의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통해 미추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더 아름답고, 더 젊고, 더 새로운 얼굴을 찾으려는 할리우드의 외모지상주의를 직접적으로 겨냥한다. 작품의 근간에는 큐브릭의 두 작품처럼 절대적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치열한 분투가 동시에 펼쳐진다. 그리고 역전되지 않는 엔트로피처럼 결국 노화에 패배하는 생명체의 한계와 거대한 무력함을 선사한다는 측면에서 독보적이고 독창적으로 염세적인 영화 세계를 창조한 큐브릭의 세련된 악취미까지 훌륭하게 오마주했다.


■ 당신도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했나요


서브스턴스 공급자는 엘리자베스에게 ‘당신은 하나다(You are one)’라고 여러 차례 경고한다. 무심한 친절함에 감사하기는 하지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같지 않은 몸으로 다른 환경에서 상반된 타인들의 반응을 통해 새겨진 개별적인 기억. 다시 말해 육체와 정신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동일인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 주장을 조언이랍시고 던지는 속 편한 무책임에 분통이 터진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그저 ‘시간’이라는 자원을 나누어 쓰는 경쟁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만 그럴까. 쉬는 시간이면 집에서 맥주 마시며 유튜브를 보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 꾸역꾸역 출근한 회사에서는 그래도 동료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한 사람의 직장인 역할을 하느라 분투하는 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때마다 돌아오는 가족 행사에 참여해 얼굴을 비추어야 하는 나. 친구들과 만나면 십수 년째 하는 추억팔이에도 똑같은 타이밍에 웃음이 터지는 나. 이 사람들 모두 각각의 환경에서 다른 인격으로 활동하는 점에서 시간이라는 자원을 나누어 쓰는 경쟁자이다.


<서브스턴스>를 보며 ‘나를 보살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후기도 많다. 틀린 말은 아닌데 위에서 나열한 수많은 ‘나’ 중에 누구는 보살펴야 한다는 말일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내 실체(Substance)를 무너뜨릴 필요 없는 대체제는 무엇일까. 2024년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엘리자베스보다 앞서 서브스턴스를 구독 중이던 남자 간호사의 물음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당신도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했나요?”. 그래 어쩌면 우리는 이미 서브스턴스를 구독 중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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