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에 관해
약 일주일 전 낮, 무심코 켠 유튜브에서 낙태죄의 합헌 여부가 오늘 헌법재판소에서 판결이 난다는 소식을 봤다. 현대 사회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꼽으라면 낙태에 관한 게 아닐까? 그리고 평소 사회적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친구와 숱하게 이야기해온 문제였기에 낙태죄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에 큰 관심이 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낙태죄 폐지에 반대한다. 그래서 적어도 위헌 판결이 나오지 않길 기대하면서 실시간 방송을 지켜봤었다.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오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낙태죄가 전면 폐지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이유를 찬성 측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들어 보겠다. 다음 근거들은 인터넷 댓글에서 주로 보이는 주장들을 가져온 것이다.
찬성 측에서는 원치 않은 임신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부모가 사회·경제적으로, 혹은 또 다른 이유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태어나,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엔 100%라는 게 없다. 반드시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그럭저럭 잘 자라거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어도 성장해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만약 평생 불행할 확률이 100%라고 해도, 나는 여전히 이 주장에 반대한다. '불행한 삶보단 삶이 없는 게 낫다'는 생각에는 일단 살아 있는 사람들의 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인다. 나조차도 막연히 '불행해도 살아 있는 게 낫다!'하고 밀어붙이진 못하겠다. 세상엔 삶이 고통스러워 스스로 삶에서 나가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불행하느니 삶을 시작하지 않을지, 아니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을지 선택할 권리는 전적으로 당사자에게만 있다. 우리가 말하는 건소위 '그건 니 생각이고'다. 그리고 태아는 선택 의사를 표할 수 없다. 그러니까, 무조건 살리고 봐야 하는 거다.
찬성 측의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피임을 해도 간혹 원치 않는 임신이 생기는 건 막을 수가 없다 즉, 완벽한 피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근거로 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완벽한 피임법은 있다. 바로 성관계를 아예 안 하는 것이다. 분명히 성관계를 하는 연인 혹은 부부는 아무리 피임을 한다 해도 임신이 될 확률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성관계를 할 것이다. 만약 운이 안 좋아 임신이 된다면, 분명 임신을 원치는 않았지만, 그 확률을 '인지하고' 았었기 때문에 임신은 미필적 고의가 된다. (미필적 고의란, 정말로 그 결과를 원하진 않았으나, 자신의 행동이 그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하면서 그 행동을 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옛날 독일 베를린 장벽을 지키던 동독 군인들이 장벽을 넘으려던 시민을 총격해 죽인 것에 대한 재판이 있었는데, 군인들은 그들을 죽이려 한 것은 아니고 다리를 쏴 저지하려고 했지만, 총격 시 반동에 의해 총이 위로 들려 몸통을 조준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쉽게 말하면 '아 이거 쏘면 잘못하면 죽겠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쐈다는 말이다.) 직접적 고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수'도 아닌, 미필적 고의로 인한 살인으로 형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 고의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지 않을까? 절대 '실수'가 아닌, 미필적이라 할지라도 '고의'로 임신한 태아를 제거할 권리를 가지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닐까?
연인과 부부 사이에 어떻게 성관계를 가지지 않을 수가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관계는 삶의 질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3대 기본 욕구는 식욕, 수면욕, 성욕이라고 알고 있지만, 인간의 3대 기본 욕구는 식욕, 수면욕, 배설욕이다. 왜냐하면 이 3가지 욕구는 한 개체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욕은 아니다. 성욕도 종의 보존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욕구이긴 하나, 일단 한 개체의 생존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욕은 3대 기본 욕구와는 달리 참는 게 가능하다. 그것을 참기를 원치 않는다면, 임신 가능성의 위험을 부담하더라도 성관계를 하는 것이고, 그 위험을 부담하지 못하겠다면 참는 것이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며, 두 선택지 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는 그 선택의 주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 두 선택지 다 고통이 따른다. 전자는 원치 않는 임신과 육아에 의한 고통, 후자는 성욕을 해소하지 못하는 고통이다.(사실 후자를 택한다 해도, 그걸 '고통'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데, 삽입 성교만 피하면 얼마든지 성관계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가지 길 모두 고통이 따르니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성관계도 하면서, 그 위험도 부담하지 않는 낙태라는 최고의 길을 찾는 것이다. 분명 태어나 살고 있는 자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 최고의 방법은 응당 행동을 결정한 자가 받아야 할 대가를 제삼자인 태아에게 대신 받게 하는 일이다. 그것도 '원치 않는 임신과 육아의 고통'이라는 대가를 '죽음'이라는 대가로 말이다. 자신의 미필적 고의로 한 행동의 대가를 제삼자의 목숨으로써 회피하는 것. 이가 인과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잘못된 것임은 명명백백하다. 합헌 판결을 내린 재판관의 판결에도, '헌법 전문은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성관계라는 원인을 선택한 이상 그 결과인 임신, 출산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위와 같은 헌법 정신에도 맞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뱃속의 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라난다. 처음에는 분열 중인 세포들로 시작해 점차 머리, 팔 , 다리 사람의 형상을 갖춰나간다. 그래서 '생명체'가 아니라 '세포일 뿐'이라며 배아 혹은 태아에겐 생명권이 없다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배아는 생각보다 빨리 사람 형상을 갖춘다. 수정 후 8주면 신체 기관이 대부분 형성되어 사람 모습을 하게 되고, 12주에는 감각을 느낄 수 있으며 발차기도 시작한다고 한다. 정말 정말 아주 초기에 정말로 세포 덩어리일 때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모습을 하고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생명이 아니라 단언할 수는 없다. 이번 판결에서 헌법불합치를 내린 재판관들은 22주까지 허용을 제시했다. 만약 낙태 허용 기간이 22주로 정해진다면, 22주와 23주의 차이는 무엇인가? 22주와 21주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처럼 수정, 착상의 분절적인 과정 후의 배아의 성장은 연속적이다. 그 연속적인 과정을 임의로 분절해 여기서부턴 생명이다, 여기 전까지는 생명이 아니다로 나누는 건 태어나 살고 있는 자들의 오만이다. 서양의 일부 국가에선 기간의 제한 없이 낙태를 전면 허용하는 나라도 있는데, 육삭둥이(24주), 칠삭둥이, 팔삭둥이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명백한 생명체 살해다.
*배아 : 임신 8주 이전
태아 : 임신 8주 이후
이 문제는 3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3에서 나는 배아와 태아도 태어나서 살고 있는 사람과 동등한 생명권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따라서 태아와 산모는 별개의 개체이며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동등한 권리를 가진 두 사람에 관해서라면, 불행하지 않을 권리보다 죽지 않을 권리가 먼저다. 행복권보다 생명권이 먼저라는 말이다.
지금도 현행법상 낙태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모자보건법에 따라 산모의 건강이 위험할 때, 범죄의 피해로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가 그 경우다. 나는 그 현행법에는 동의한다. 왜냐하면 그건 긴급피난*의 논리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위에서 밝혔다시피, 아무 사유가 없이도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그런 경우의 낙태가 쉬워지는 건 좋은 일이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 미필적 고의로 임신한 태아를 낙태하는 일도 많을 것이다. 물론 여성이 낙태가 허용된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낙태를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안다. 합법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무겁고 고민을 많이 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워도 잘못은 잘못이다.
*형법 제22조(긴급피난) ①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위난을 피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찬성 측의 주장은 기저에 여성의 상대적 불리를 해소하고 평등에 다가서는 권리를 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선 여성과 남성의 유불리에 앞서 어른과 아기의 관계에 집중했다. 물론 이 문제가 여성의 권리와 뗄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알고 있다. 듣자니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는 남학생이 여학생을 임신시킬 경우, 정상적인 성관계였더라도 남학생을 퇴학시키는 법이 있다고 한다. 이 글에서 방법을 구구절절 제시하진 않겠지만, 진짜 필요한 것은 낙태 합법화가 아니라 위와 같이 원치 않는 임신을 최대한 예방하고, 원치 않는 아기를 가지더라도 키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남성도 임신과 낙태에 여성과 동일한 정도의 책임을 부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뱃속의 아기를 없애는 간단한 방법보다 훨씬 더 어렵겠지만, 이건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합헌 판결을 내린 재판관의 판결문에 이런 말이 있었다.
우리 세대가 상대적인 불편요소를 제거하는 시류·사조에 편승하여 낙태를 합법화한다면 훗날 우리조차 다음 세대의 불편요소로 전락해 안락사, 고려장 등의 이름으로 제거대상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 쓰냐며 비웃었지만, 나는 '상대적인 불편요소를 제거하는'이라는 말이 크게 와 닿았다. 우린 이미 상대적인 불편요소를 제거하고 있다. 바로 장애인이다. 물론 법적으로는 아니다. 그리고 신체장애인들은 이제 모두 사람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지적장애인들은 아직 일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짐승 취급을 받는다. 심지어 '보호'라는 명목 아래 장애인 시설을 만들어 당사자의 동의 없이 감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불편하니, 목소리도 내기 힘든 그들을 격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정부와 지자체에서도 그 상황을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이처럼 '상대적인 불편요소를 제거'한다는 말은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다. 고려장과 안락사가 과대망상이라고 느껴진다면, 인터넷을 보라. 노인에게서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고령화 문제는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가장 큰 시련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