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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살 Apr 10. 2019

애도가 사라진 사회

자살을 보는 우리의 시선



  얼마 전, SNS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지난해 11월, 23세 대학생이 한강에 투신했다가 살기로 마음을 바꿔 119에 신고한 일이 있었다. 그는 끝내 숨지고 말았고, 신고 통화 과정에서 접수요원이 장난전화인 줄 알고 다소 늦장 대응을 한 것이 확인되어 징계를 받은 사건이었다.

댓글에서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따지고 있었다. 이젠 그리 놀랍지도 않지만, 사망자를 비난하는 댓글이 119 요원을 비난하는 댓글만큼 많았다. 그중에서 특히나 집요하게 물어뜯는 사람이 있었다.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언사에 자는 것도 잊고 손가락을 두드리며 싸우게 돼 버렸다.

‘다시 살 거였으면 왜 뛰어내렸냐’

‘자살하는데 오만 사람들 다 피해 주고 가네 소방대원들 존나 불쌍’

‘죽으려고 뛰어내렸다가 살아야겠어서 전화? 애초에 후회할 행동을 하지 말든가’

‘죽을 용기 가지고 어떻게든 살아볼 수 있을 텐데 노력하기 귀찮아서 자살해서 민폐 끼친 벌레다’


  자살 사건을 바라보며 이야깃거리로 삼는 보통 사람들 대부분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몰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더라도 세상엔 다 자신과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위 사람의 말처럼 죽을 용기로 뭔들 못하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정신력의 강도가 다르다. 같은 충격을 받아도 버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너지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사망자의 삶에 관해 아무런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막말하며 비난하는 건 도를 넘은 언사라는 것. 이것에 논쟁의 여지가 있을까? 이것으로 애초에 말싸움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참혹하다.


  그는 자살한 사람을 벌레라고 불렀다. 죽은 사람은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댓글을 쓴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벼랑에 몰려 있었는지. 그는 그 상황에 대해 겨우 기사 한 편 분량만 알 뿐이었다. 성별과 나이. 119 통화내용.

  물론 민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자살은 여러 사람의 수고를 야기하는 건 맞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고립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이 아닌가. 자살의 결심은 갑자기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많은 상황과 요인이 영향을 끼쳐서 나온 결과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자살을 한다. 그리고 그건 100%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요인이 얽히고 꼬여 초래한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과 이웃인, 같은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에서 삶을 누리는 우리는, 어쩌면 그 죽음에 먼지 조각만큼이라도 간접적인 책임이 있을지 모르는 우리는, 그 죽음에 조의는 표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자살을 민폐라고 부르는 대신 묵묵히 수습해 주는 것 정도는 기꺼이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는 냉정히 잘잘못을 따지기보단 안타깝다고만 한마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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