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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살 Apr 04. 2019

잉글랜드어 - 한국의 제 2 공용어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에 관해



“복숭아 아이스티 하나 주세요.”

사이즈는 뭐로 드릴까요?”

여기서 가게 표준대로라면 ‘레귤러로 주세요.’라고 해야 맞았다. 하지만 레귤러가 입에서 나오기 전에 왠지 오기가 생겼다.

“보통으로 주세요.”


  그러고 보면 이 가게는 모든 것이 영어다. 간판부터 EDIYA COFFEE, 메뉴판에는 BLENDING TEA, SHAKE, BEVERAGE, COFFEE, 풋사과, 청사과라는 말을 놔 두고 그린애플, 벽에 걸린 커피 그림 속엔 THE SECRET TO GREAT FLAVOR, 화장실에는 RESTROOM… 도대체 여기가 한국인지 한인타운인지 알 수가 없을 따름이었다. 어이없음을 너머 화가 날 지경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한 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본래 한국이 미국에 휘둘린다는 태세를 비꼰 정치적 농담이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미국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성장하면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해도, 현재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영어를 많이 쓰고 있다. 과장하지 않아도 길거리의 가게 간판들은 한글보다 영문으로 된 게 더 많고, 한글로 적힌 간판 중에도 반은 영어를 한글로 쓴 것이다. 한국어를 한글로 써 놓은 간판은 많이 없다. 그리고 안내 표지판도 영어로 돼 있는 게 많다.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 한 관광객이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영어가 아주 많아서 다니기 편하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물론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영어로 안내를 잘해 놓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문제는 영어로‘만’ 적어 놓으니까 문제다. 아무리 세계화 시대라 할지라도 여기는 한국이고 민족 고유의 말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입구와 출구라는 글자는 없고 IN, OUT만 덩그러니 적어 놓거나 주차장엔 PARK, 정수기 위엔 WATER만 적혀 있는 모습을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심지어는 관공서와 공공시설에서도 영어로만 안내표지판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공교육이 발달해 그 정도 영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지만 아직은 영문에 곤란해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대구광역시의 문장

  그리고 그게 문제가 아니다. 단지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이다. 민족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언어다. 언어는 그 사회의 모든 사고방식, 생활양식이 담겨 있는 문화의 총체이다. 우리가 한국어로 말하고 한글로 글을 쓰기에 한국인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어는 한국인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마치 서양의 식민지를 자처하는 것처럼 스스로 한국어를 마모시키고 영어를 ‘세련된’ 것으로 추켜세우고 있다. 표지판뿐만 아니라 단체명, 상품명, 심지어는 정책명까지도 영어와 영문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동아리를 하나 만들었다. 문학 동아리였는데 이름을 만들 때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다. 이름을 한국어로 만드냐, 영어로 만드냐 하는 것이었다. 모든 그럴듯한 한국어 이름을 들며 친구들에게 협조를 구했지만 모조리 거절당하고 결국 동아리 이름은 ‘LITERARY’가 되었다. 명색이 문학 동아리에, 담당 선생님까지 국어 선생님인 동아리 이름이 영어로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대학교에 와서 국문학과 학생회 중 글 쓰는 부서에 들었는데, 그 부서 이름도 영어였다! 분류상 명칭이 편집부여서인지 EDIT라는 이름이었다. 아니, 세상에, 아무리 영어로 이름 짓는 세상이라지만 국문학과 부서 이름이 EDIT라니!


복수단 : 무한 전쟁


  영화 제목에도 문제가 많다. 요즈음의 할리우드 영화는 거의 모두 영어 발음을 그대로 한글로 옮기고 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어벤져스』,『비포 선라이즈』,『러브 액츄얼리』… 모두 한국어로 번역이 가능한 제목들이다. 심지어 한 문장으로 된 제목까지 영어 발음 그대로 옮겨오는 걸 보면 한국어의 수명이 길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한숨이 나온다. 만약 『반지의 제왕』이 2010년대에 나왔다면 『로드 오브 더 링』으로 옮겨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번역에 익숙해져, 어벤져스를 복수자들이라고 하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미국 게임 회사 '블리자드'의 게임을 오랫동안 즐겼다. 블리자드의 한국 지사는 게임 속의 언어를 어쩔 수 없는 한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 시리즈에서는,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스타크래프트 1」에서는 이용자들이 게임 속의 건물과 병력을 영어로 그대로 불렀다. 


마린(Marine)

커멘드 센터(Command Center)

배틀 크루저(Battle, Cruiser)


하지만 십수년 후 후속작인「스타크래프트 2」가 나왔고, 블리자드 한국 지사에서는 게임 속 언어를 한국어화했다.


마린 → 해병

커멘드 센터 → 사령부

배틀 크루저 → 전투순양함


  이용자들의 반응은 처음에는 좋지 않았다. '해병이 뭐냐 해병이' 이런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용자들은 새 한국어 이름들에 익숙해졌고, 한국어 이름도 멋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늘어났다. 한국어 이름들로 줄임말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만약 「어벤져스」가 처음 나왔을 때, 복수자들, 복수단, 혹은 더 그럴듯한 어떤 한국어로 번역했더라면, 처음엔 이상했을 지 몰라도 어느샌가 그 이름이 익숙하고 멋있게 느껴지게 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어와 영문이 주는 이국적인 느낌과 세련됨은 가히 매력적이다. 그 반대로 한국어는 친숙한 만큼 왠지 뻔하고 촌스러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다. 영어가 멋있다고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많이 쓰게 된다면 언젠가 한국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쓰는 말들만 봐도 영어가 한국어를 대체하고 있지 않은가. 어느 날 랜덤(random)이라는 말이 원래 우리말로 뭐였는지 통 생각이 안 나는 것에 충격받았다. 랜덤이 ‘무작위’였다는 걸 생각해 내기까지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이것 말고도 쿨하다, 핫하다, 패턴 등 이미 영어로 대체된 한국어 단어 희생자들이 많다. 방송에서는 공공연히 ‘소식’이 아니라 ‘뉴스’를 내보내고 있다. 


  예전에 외국어의 유입에 관한 한 글에서 충격적인 문장을 봤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일본어를 배우고 우리말을 금지당했던 때보다 오늘날 우리 스스로 외국어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외압을 견뎌낸 역사가 무색하게도 정말로 우리 손으로 우리말을 단두대에 올려놓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대신, 우리말에 자부심 갖고, 정성 들여 아끼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용자 수에 따른 언어 순위에서 13위라는 높은 순위를 가지고 있는 언어, 그 어느 언어보다 다양한 응용이 가능한 언어, 강대국에 지배되어 사라져버린 언어와 달리 강인하게 살아남은 언어. 멋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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