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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살 Sep 23. 2019

'더'

'아직'이 아닌


  횡단보도를 힘없는 걸음으로 건너는 할머니를 도와주는 아저씨가 담긴 블랙박스 영상
   심정지 환자를 심폐소생술로 살려냈다는 고등학생
   위험을 무릅쓰고 고층 난간에 매달린 고양이를 구하는 구조대원


  뉴스엔 나쁜 소식이 더 많은 것만 같은 세상이지만 이렇게 가끔씩 타인을 기꺼이 도와줬다는 훈훈한 사연이 들려오곤 한다. 이런 소식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겐 고정 멘트가 있다.


아직 살 만한 세상이다~


  이 표현을 말하는 화자는 마음속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소에는 살 만하지 않은  세상이라고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사회'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이 단어에서 어떤 아우라가 느껴지는가? 그 본래의 뜻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경쟁이 만연하는 '현대 사회'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마인드맵에는 '삭막함, 정이 없음,  범죄, 갈등' 등의 관념이 함께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그리 작은 친절과 이타심의 표출에도 크게 감동하는 것일 터이다.


  그 감동의 표현에 굳이 태클을 걸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아직'이라는 말에서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는 나뿐인가? '아직'이라는 부사어를 붙이는 화자의 마음에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세상이 말세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 사회의 삭막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우리의 앞날에 놓인 건 옛날의 정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회색 도시의 내리막길뿐이라는 체념이다. 이 체념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아직'이 '살 만한 세상'에 바위에 낀 이끼처럼 붙어있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정말로 우리 사회의 앞길에는 내리막길만 놓여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내가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무근본의 낙관주의를 품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라델피아에서 온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한국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갈등을 적절히 다루지 못하고 잘못된 방식으로 격화시키고 있어. 하지만 그건 한국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야. 현대 사회가 나빠서도 아니고. 그건 한국이 현대 사회로 이제 막 접어든 현대사회의 초년생이기 때문이야. 서양 국가들은 200-300년에 걸쳐서 현대화가 되었지만, 한국은 불과 수십 년 만에 현대화했고, 개인주의와 새로운 갈등을 급격하게 받아들였어. 그래서 처음인 거야. 처음엔 누구나 잘 못하잖아? 그러니 괜찮아. 앞으로 잘 배워 나간다면.

  그래. 우린 처음이다. 말세나 내리막길이 아닌, 오히려 오르막길을 이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잘 생각해 보면 우린 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왔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약자들이 디딜 땅을 만들었고, 평등의 스프레이를 공기 중에 뿌렸다.  앞으로 '현대 사회'의 마인드맵의 자리를 새로운 정(情)과 이웃과 서로 도움이  채울 수 있도록, '아직'을 떼 버리자. 대신 이제 '더'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로 물결을 이뤄 이끼 없는 강물로 흘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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