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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에 걸린 수금, 침묵으로 부르는 저항의 노래

시편 137-1-9 버드나무에 걸린 수금, 침묵으로 부르는 저항의 노래

시편 137-1-9 버드나무에 걸린 수금, 침묵으로 부르는 저항의 노래

참된 희망은 화려한 제국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비탄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기억을 놓지 않는 거룩한 고집에서 싹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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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총이 낯선 땅에서 길을 잃은 듯한 막막함 속에서도, 하늘의 이정표를 찾으려 애쓰는 여러분의 심령 위에 고요히 임하기를 빕니다.


누구에게나 마음 한구석에 ‘바벨론 강가’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떠밀려와 버린 자리, 내 영혼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현실, 그리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 무력감에 젖어 눈물짓는 시간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시편 137편은 바로 그 상실과 비애의 자리에서 터져 나온, 가장 처절하고도 인간적인 기도의 육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 있습니다. 그곳은 패배자들의 수용소였고, 희망이 유배당한 땅이었습니다. 화려한 제국의 문명 앞에서 초라해진 그들은 시온을 기억하며 웁니다. 그런데 잔인하게도 압제자들은 그들에게 노래를 청합니다. “자, 너희의 그 유명한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뽑아 보아라.” 이것은 요청이 아니라 조롱이며, 패배자의 자존심을 짓밟는 폭력입니다. 제국은 언제나 약자들의 고통마저도 자신들의 유흥거리로 소비하려 듭니다.


그때 시인은 결단합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절) 그들은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어버립니다. 악기를 연주하지 않겠다는 선언, 그것은 단순한 거부가 아닙니다. “너희들의 유흥을 위해 나의 신앙을, 나의 거룩한 기억을 팔지 않겠다”는 침묵의 시위이자, 영적인 파업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장단에 맞춰 춤추기를 거부하는 것, 비록 포로의 신세지만 내 영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선포하는 ‘거룩한 고집’이 그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 있습니다.


본문 5절과 6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재주를 잊고, 혀가 입천장에 붙어도 좋다고 맹세합니다. 왜 이토록 ‘기억’에 집착할까요? 기억하지 않으면 동화(同化)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압도적인 힘과 풍요로움은 서서히 그들의 영혼을 잠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힘이 곧 진리다”라고 속삭이는 제국의 논리에 먹히지 않는 유일한 길은, 무너진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망각과의 싸움입니다. 화려한 현세의 욕망 속에서 우리가 본래 누구였는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를 기억해 내는 치열한 투쟁입니다.


시편의 마지막 부분(7-9절)에 이르면 우리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에돔에 대한 저주, 심지어 바벨론의 어린아이들을 바위에 메어치라는 끔찍한 복수의 언어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점잖은 신앙인들은 이 구절을 황급히 건너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 날것 그대로의 분노 또한 성경의 일부입니다.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폭력을 행사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억압받는 자들의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정제되지 않은 피 울음입니다. 정의가 실종된 세상, 악이 승리하는 것 같은 현실 앞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시인은 그 지독한 증오와 분노조차 감추지 않고 하나님께 쏟아놓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이 이렇게 지옥입니다. 정의를 행하여 주십시오.” 역설적이게도 이 기도는 심판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자신이 직접 복수의 칼을 드는 것을 멈추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어떤 노래를 부르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에서의 성공과 안락함을 위해, 바벨론의 강가에서 그들이 원하는 노래를 억지로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본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영혼의 수금을 팔아넘기곤 합니다.


때로는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에 영합하기를 거부하고,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거룩한 침묵을 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이 땅의 화려한 바벨론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삶의 깊이를 안다고 했습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바벨론 강가에서 울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 눈물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아직 당신 안에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토해내십시오. 날것 그대로의 마음을 주님께 가져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비탄을 들으시고, 결국 그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망각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그 처절한 몸부림 속에, 이미 구원의 새벽은 밝아오고 있습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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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7-1-9 바벨론 강변의 침묵: 찢어진 영혼의 정직한 고백

바벨론 강변에서 터져 나온 포로들의 침묵(시 137:1-4)과
격렬한 탄식(시 137:8-9)은,
인간의 무력함 속에서도 변치 않고 그들의 아픔을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깊은 긍휼(헤세드) 에 대한 영혼의 정직한 증언이자 거룩한 순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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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7편은 기원전 6세기의 뼈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예루살렘, 곧 마음의 고향을 잃고 바벨론의 강변에 꿇어앉은 이들은 그들의 수금(竪琴)을 버드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 노래할 수 없는 침묵의 시간, 이는 단순한 물리적 유배가 아니라 영혼의 상실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역시 물질적 풍요 속에 살지라도, 마음의 중심을 잃고 영적인 '놋 땅'(방황의 땅)에서 근원적인 쓸쓸함과 무력감을 경험하는 순례자가 아닌가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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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정직한 침묵, 거룩한 거절

이 비애의 한복판에서 압제자들은 포로들에게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고통을 값싼 오락으로 소비하거나, 억압적인 현실을 비겁한 긍정으로 덧칠하라는 세상의 폭력과 다름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을 안락함이나 자기 강화의 도구로만 이해한다면, 쉽게 이 조롱에 굴복하여 영혼의 노래를 흥정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이 침묵은 단순한 슬픔의 표현을 넘어선 영적 용기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고통을 직시하며 정직한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거짓된 위로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때까지 끈질기게 그 자리에 서 있겠다는 저항을 선언합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인생의 가장 어둡고 찢겨진 부분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나는 순례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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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고통의 심연과 하나님의 긍휼

이 시편의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바벨론의 어린아이를 바위에 메어치는 극단적인 복수심은 종교적 언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인간의 원한과 분노의 심연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이 구절 앞에서 성서의 가르침에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잔혹한 탄식은 윤리적 당위가 아니라, 극심한 학대 아래 짓눌린 인간 영혼이 토해내는 정직한 비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이나 완벽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귀 기울이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죄와 허물, 이기심이라는 옛사람의 찌꺼기에 쉽게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추한 감정으로 가득할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기보다, 우리의 쓰라린 고통까지 당신의 것으로 끌어안으시며 변치 않는 인애(헤세드)로 우리를 지키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 세상의 불의를 일거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의 강변에 꿇어앉아 정직하게 우리의 무력함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과 사랑을 통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새로운 세상의 꿈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값없는 은혜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에,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땅에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이라는 푯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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