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네피스 Aug 17. 2018

날씬하고 싶지만 다이어트는 싫어

죽음을 목격한다는 건

회사 동료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와 동갑이어서 그랬을까, 괜시리 눈물이 났다.

나는 같은 나이대에 반응하는 감정의 폭이 더 큰 편인데,

동갑의 불행에는 어쩌면 나도 겪을 수 있다는 불안감과

동갑의 행복에는 나는 왜 하지 못했을까, 사이의 감정기복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동갑 동료의 아버님 부고 소식은 퍽 충격이었다.




가족의 죽음을 목격한다는 건, 인생에 대한 회의감을 경험할 수 있는 큰 사건이다.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든, 못 느끼고 있든 죽음이 앗아간 빈자리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깊고 크다.

그 허무함, 허전함은 장례식이 끝나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밀려온다.

그걸 감당할 수 없어 울거나, 자거나, 울며 자거나 혹은 먹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죽음엔 애도가 필요하다. 그 사람의 빈자리를 곱씹고, 그 사람이 나에게 주었던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 사람의 손길과 말투를 그리워해야 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괜찮은 척, 씩씩한 척도 충분한 애도의 기간이 흐른 후 가능하다.

애도의 기간만큼은 그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왜 그 혹은 그녀 같이 착한 사람을 먼저 데려 갔냐고 신에게 충분히 따져봐야 하고,

그 혹은 그녀가 없는 내 삶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두려워해야 한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음에 좌절해야 하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나누지 못함에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해야 한다.


가끔 그 사람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어, 가 아니라

매일 그 사람이 그리워서 눈물을 흘리고 있어, 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그 사람은 내 가슴 속에 기억 속에

상처가 아닌 흔적으로 남는다.




나는 아직도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 나를 가장 사랑해줬던 사람, 나의 멘토, 나의 러닝메이터 였던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날씬하고 싶지만 다이어트는 싫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