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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 Feb 18. 2024

어떤 날은 층간소음이 위로가 된다.


오늘 아침도 예외 없이 위층의 층간소음이 시작된다.

둔탁한 어른의 발소리(뭐야, 최소 100 킬로그램은 되는 거 아냐? 살 좀 빼시지)

아이들 고함 소리(야, 너희들은 밥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일찍 일어나는 거야)

밤늦게 청소기 미는 소리(밤은 청소가 아니라 취침을 하는 시간이랍니다 제발)

가구 끄는 소리 등 종류도 강도도 참 다양한 소음들이다.

소심한 나는 인터폰을 하거나, 직접 찾아가는 경고성 방문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저 참다 참다 욱하는 성질이 올라오는 때면 바닥 닦는 밀대를 들고 천정을 쿡쿡 찌르는 게 고작이다. 

물론 공허한 찌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그 강도가 다르다. 그것도 아침 9시가 되기도 전부터.

주말 아침이니 온 가족이 쿵작으로 소음 만들기 잔치를 벌인 모양이 군하며 체념의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독이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한데, 혹시 가정폭력 같은 위급한 상황인가 되려 걱정이 될 지경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만 나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즐길 수 없으니 피해야지. 

강아지와 산책이라도 나가 버려야겠다는 마음에 날씨를 확인할 겸 드리워져 있던 거실 블라인드를 걷었다. 

블라인드가 서서히 걷히며 좀 흐린 하늘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잎 하나 없이 앙상한 나뭇가지도 보이고, 

그리고 웅장한 트럭 한 대가 서있다. 길쭉하고 높은 5톤 이삿짐 트럭이다.

힘들게 추운 날 이사하는구나 하며 별생각 없이 돌아서다 다시 홱 돌아봤다.

뭔가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다. 

아 윗 집이 오늘 이사하는 거구나.

나도 모르게 화색이 돈다. 어깨춤까지 추고 싶어서 곤히 자고 있는 강아지를 올려 안고 거실을 빙글빙글 돌다 창문 앞에 서서는 이삿짐 트럭을 보여주며 자랑한다.

"와, 드디어 저 사람들 가나 봐. 짱아야 우리 이제 해방이야"

산책 피난의 계획을 급선회하고 커피 한잔 끓여 와 소파에 앉았다.

이제껏 들어왔던 모든 소음의 종합세트 같은 이사소음을 아주 하나하나 알알이 분석하며 듣고 앉아있었다. 



누군가가 떠나가서 이렇게 기쁜 적이 이런 것 말고 또 있었나 떠올려보게 된다.

사실 헤어짐, 마지막 이런 말에 나는 무조건 약하다.

이사를 해 떠나오게 되면 살던 집, 근처 가게, 집 앞 나무에도 섭섭함을 느끼고, 여행을 갔다 돌아올 때도 유독 마음에 드는 장소나 건물, 풍경이 있다면 이걸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쓸쓸해지곤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떠나가려 짐을 싸는 소리를 듣는 게 이렇게 안도가 된다니, 아니 이렇게 기쁘기만 하다니. 

물론 최근에 이사 와서 3개월 사는 동안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니 서운함 따위 느낀다는 건 오버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이삿짐 싸는 소음이 잦아들수록 뭔가 조금 허전해지려고 한다.

그 지긋하던 소음이 주던 말도 안 되는 위로가 비집고 생각난다.



식구들이 각자의 일상으로 바빠 집에서 떠나고 최근엔 혼자 있던 날이 내겐 많았다.

어제와 똑같은 날이 시작된다는 무료함으로 뜨는 아침 기상시간에, 또는 뉘엿뉘엿 해지는 노을을 보며 느끼는 쓸쓸함에 무기력해지려고만 때, 가끔 무서운 느낌이 드는 밤늦은 시간, 그 층간소음이 주었던 찰나의 위로가 떠오른다.

쓸쓸함을 걷어내고, 무기력을 털어내고, 무료함을 환기시켜 줄 성가심을 줬다. 혼자 있지 않다는 안도를 선물한 셈이다

그러고 보니 사실 그 층간 소음이 아예 못 견딜 만한 것도 아니지 않았는가.



아이가 꽥꽥 대며 울어 젖히는 소리가 들릴 때면 유독 울음 많던 우리 둘째 아들 아기였을 때가 생각나고, 아빠 발망치 소리를 따라 우다다다 뛰어가는 아이들 소리를 들으면서는 아주 오래전 두 아들과 숨바꼭질하던 남편의 신난 얼굴이 앞에 보이는 듯했고, 거의 자정가까이에 청소기 미는 소리를 들으면서는 그 집 엄마 참 개념 없이 부지런하네하고 혼잣말을 내뱉으면서 아이들 잠든 후에야 가졌던 나의 피로하고 막막했던 육아시절의 막간 휴식이 떠올려지기도 했다.

그 소음들의 리듬에 맞춰 나는 내 20여 년 전의 일들을 반추한 것이다.

잊혔던 추억을 마주하게 했고,  문득 공허함이 느껴지는 순간에 어찌 되었던  몇 발자국 올라가면 나와 비슷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위로를 받을 수도 있었다.

떠나간다고 하니 여유로워진 마음에, 관용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기에 드는 윤색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동안의 그들에 대한 핀잔과 불만을 덕담으로 바꿔 빌어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다.



소음이 잦아들고 있다.

창밖을 보니 내려온 잡동사니 짐들을 트럭에 싣고 있는 게 보인다.

이제 곧 출발할 모양이다.

3개월간의 천방지축 나의 이웃이 어느 곳에 가든 잘 살기를 바란다.

대체 왜 저리 별난 거야 하며 혼자 퉁박줬던 그 집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그리고 점점 예의를 배우며 잘 커나가기를 바란다.


(사진: Unsplash의 Brandon Grig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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