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소소했지만 나에겐 소중했던 그 날
3월 14일이 벌써 기억에서 잊혀져 간다. 누군가는 일상처럼 연인과 사탕을 나누고, 누군가는 잔뜩 마음의 준비를 한 채 선물을 꼭 쥐는 그 날. 그러나 나는 조용했다. 화이트데이에도 여지 없이 학교와 집을 오가며 일상적인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호주에는 화이트데이의 개념이 없다. 이미 발렌타인 데이가 성별 구분 없는 기념일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다졌기에,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3월 14일이 또 하루의 조용한 날일 뿐이었다. 나 또한 화이트데이를 조용히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적막함을 견딜 수 없어 친구를 부르고 도서관을 탈출했다.
학교 뒤 맛집에서 남성 둘이 적적하게 분위기를 냈다. 슈니첼을 먹고, 파스타도 먹고. 이런 화이트데이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텅 빈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야 어쨌든 나았다. 저녁을 먹은 우리는 밖으로 나와 얼음과자나 흡수하자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음과자, 얼음과자. 계절이 반대인 호주에서 더위를 달래기에 얼음과자 만큼 좋은 건 없었다.
얼음과자 먹으러 가는 길, 이전엔 신경도 쓰지 않던 건너편 바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바가 눈에 들어온 이유는 다름 아닌 배경음악. 그 곳에선 나의 영웅이자 넘버원 밴드인 '폴리스(The Police)'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고, 나와 내 덕에 같이 폴리스 팬이 된 친구는 무엇에 이끌린듯 걸음을 멈추고 그 곳을 빤히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원체 마이너한 나의 시계는 다른 이와 달리 거꾸로 흘렀다. 77년에 데뷔해 86년에 해체한 전설적인 밴드 폴리스. 나는 30년이 지난 뒤에야 그들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늦깎이 팬이었다.
한국에서 내 취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음반 가게를 가도 그들의 앨범은 많아야 한두 개가 전부였다. 그 와중에도 나는 꿋꿋이 덕질을 자처했고,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 들른 멜버른의 공연장 순례를 덕질의 유일한 기쁨으로 삼고 있었다. 멤버들의 자서전을 하나하나 원서로 찾아 해독했다. 다큐멘터리를 일일이 찾아 돼도 않는 리스닝으로 완청했다. 작년 스팅이 내한공연을 가졌을 땐, 급전을 위해 중고책을 싸그리 갖다 팔고 티켓창을 스물 두 시간 새로고침 해 4백 장 중 한 장을 가져갔다. 그제서야 다리가 풀리고 거의 울부짖는 내 모습에 친구들이 안쓰러워 놀리지도 못 했다더라.
폴리스의 음악은 남들과 달랐다. 셋의 조합은 'Roxanne', 'Every Breath You Take'와 같은 명곡을 만들었으며, 나는 여전히 그들의 공연이 펼쳐진다면 내전지역과 IS 위수지역을 빼고 어디든 날아갈 자신이 있다.
이름부터 비싸 보이는 곳에서 들리던 폴리스의 명곡 'King of Pain'. 나와 친구는 피아노 바 앞에 우두커니 서서 음악을 음미했다. 얼음과자 계획을 폐기하고 이 곳에 들어가면 지갑이 얇아질 테다.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반농담으로 "다음 곡 폴리스면 내가 들어갈게. 근데 그럴 일 없겠지"라고 자조했고, 실제로 노래가 끝날 때쯤 발걸음 옮길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곡도 폴리스였다. 그 다음 곡도 폴리스였다. 호주의 공공장소에서 그들의 노래가 들린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연속적인 적은 없었다.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나는 그 때가 되어서야 값이 얼마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했다. 들어가니 다행히 맥주도 있어 아사히 한 병. 친구는 호주 맥주인 쿠퍼스 페일 에일을 마셨다.
밤 아홉 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은 덕에 길거리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그걸 같이 들은 친구는 또 내가 유일하게 전도에 성공한 폴리스 팬이었다. 우연도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그리고 모든 경우의 수가 겹친 행운이었다. 폴리스 메들리를 듣고 있자니 흥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렇게 우리는 몸을 흔들며 폴리스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나의 일방적인 간증이었다.
내가 처음 얘네를 알게 된 때가 호주로 유학 온 직후였어. 영어도 안 되고 친구도 없으니 할 게 없잖아. 그래서 TV만 주구장창 봤거든. 근데 아까 말했듯 난 영어가 안 돼. 그럼 내가 볼 건 뭐가 있냐. MTV 밖에 없어요.
그 때 마침 나온 게 폴리스의 'Roxanne' 뮤직비디오. 내가 그 때 그 곡을 듣고 뻑 갔거든. 그러고 잊고 있다가, 언젠가 2008년 Roxanne 재결합 라이브를 보고 덕질이 시작 됐지.
스팅 내한공연 400명 한정수용이랄 때 현대카드 단식시위 할 뻔 했는데... 결국엔 갔어. 다들 스팅 솔로곡에 환호할 때 혼자 폴리스 시절 곡들 합 맞춰주고 떼창하고 그랬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끝없는 자랑의 순간. 착해빠진 친구는 계속된 간증에 장단을 맞추고 또 맞췄다. 그 때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폴리스 노래를 흥얼거리던 아저씨가, 피아노 앞에 앉더니 스팅의 'Englishman in New York'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륜이 잔뜩 묻어나는 보컬은 덤. 우리는 '알고 보니 피아노맨'인 아저씨의 반전매력에 빠져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박수를 치고, 훌륭한 공연이라며 엄지를 세웠다.
아저씨는 극찬에 삘을 받았는 지 연이은 앵콜을 이어갔다. 중간중간 우리에게 미소를 날려 주시며. 마지막엔, "끝장나는 곡 하나 해주겠다"며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을 연주하셨다.
좋은 분위기, 좋은 공연에 관객은 우리 밖에 없었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으리라고 아저씨도 생각했으리라. 끝나고 감탄사를 숨기지 않으며 극찬을 하는 우리에게 아저씨는 "반년 만에 처음 한 곡"이라고 화답했다. "너희처럼 쿨한 관객이 흔치 않아서 해본 거"라며.
"여기 몇 번 와봤지? 얼굴 몇 번 본 것 같다."
"아뇨, 처음이에요. 우리 폴리스 팬인데, 계속 폴리스 노래 들려서 들어왔어요."
"아, 그래?"
아저씨는 우리에게 초기 폴리스가 좋냐, 후기 폴리스가 좋냐고 물었다. 초기 음악은 펑크를 기반으로 한 레게, 보사노바의 혼합물이었고, 후기 음악은 본격적으로 밴드 사운드 이외의 소리를 도입한 뉴웨이브였다. 나와 친구는 각자 다른 취향을 이야기 했고, 아저씨는 몇 곡을 언급하는가 싶더니 이내 "아이패드 쓸 줄 아느냐"고 물었다.
"여기서 곡 고르면 되니까 마음껏 골라. 너희 듣고 싶은 거 들으면 돼."
이 아저씨, 몰랐는데 사장님이었다.
드넓고 탁트인 피아노 바, 수천 만원 짜리 스피커로 우리는 폴리스 노래를 만끽했다. 열한 시가 넘어 술 마시기 좋은 시간대가 되었다. 안쪽을 기웃거리는 행인과 들어오는 손님들. 사장님은 밖에서 담소를 나누며 우리를 말리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된 선곡으로 DJ가 느끼는 희열이 무엇인 지 몸소 실감했다.
손님들이 우리의 음악에 맞춰 눈을 감고 리듬을 즐겼다. 조금씩 몸을 흔들며 폴리스 노래를 따라했다. 이것이 내게는 거대한 보람이었고, 다시 없을 기억이었다.
내 취향을 알아준 사람들이야 물론 간혹 있었고, 하나 같이 내 간증을 받아주며 훌륭한 밴드라고 받아쳐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날 만큼은 유독 특별했다. 외로운 타지에서 만나 더욱 반가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자신의 아이패드 마저 선뜻 내어준 사장님의 성의에 감동해서 그랬을까. 숨겨 온 덕질이, 마침내 보답 받는 기분이었다.
음악은 우울함을 단숨에 치유했다. 내가 사랑하는 밴드의 음악이 모두에게 퍼져 나갔고, 나는 언제나 과거였던 그들의 음악이 현재가 되는 현장의 자랑스런 증인이었다.
손님이 모이자 사장님은 다시 바로 들어와 피아노를 잡았는데, 그 때가 마침 폴리스의 'Message in a Bottle'이 흘러 나올 때였다. 나를 완전한 덕후로 만든 곡이자 폴리스를 본격적인 스타 밴드로 올려 놓기도 한 명곡. 노래를 끄리라는 예상과 달리, 사장님은 즉석에서 원곡에 합을 맞추며 피아노를 연주했다. 우리를 위한 서비스였다. 수 많은 손님들 앞에서, '쿨'하던 우리를 위해 흔쾌히 피아노를 잡은 것이다.
잠깐 파트를 헷갈리는 것마저 그렇게 인간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음악이 이어준 유대감은 그 무엇보다 단단했다.
이어서 나오는 'Walking on the Moon'에서는 연이은 음이탈. 사장님은 "무지하게 어렵네"라며 멋쩍게 웃었지만, 우리에게 그런 음이탈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이 노래는 아무도 못할 거예요," 원곡자 스팅조차 나이가 들어 힘들어 하는 곡이었다.
자정이 되어 피아노 바를 나올 때까지, 예정에도 없던 맥주를 두 병씩 들이키고 볼이 빨개져서 나왔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나의 덕질이 마침내 공감 되고 나눠졌기에. 폴리스, 당신들을 향한 나의 사랑을 더욱 굳히는 순간이었다. 화이트데이에 방콕만 했다면 결코 겪지 못 했을 환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