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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 That Feb 25. 2018

나만의 토토가, 로비 윌리엄스 공연을 가다

특별한 사람에게서 공연의 본질을 찾다

내가 음악에 빠진 게 2007년 중1 때였고, 로비를 처음 안 게 2004년 초4 때였다.

모 축구 영상의 배경음이었던 'Let Me Entertain You'를 무한히 반복하던 나는, 본격적으로 음악에 빠진 중1 때 로비의 베스트 앨범을 샀다. 내가 가장 먼저 덕질한 가수가 린킨파크와 원더걸스, 그리고 로비 윌리엄스였다. 그를 향한 마음이 각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물론 그 시절의 로비는, 'Rudebox'를 발매하고 망해가는 중이었기에 내 머릿속에서 차츰 잊혀졌다. 훗날 'Reality Killed the Video Star'를 들고 돌아왔지만 그 땐 이미 내 관심에서 지워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Let Me Entertain You'만큼은 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즐겁게 해줄게', 이 가사 안엔 로비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 어떤 부정적인 말도, 로비 앞에 붙으면 긍정이 된다. 로비는 망나니고 양아치다. 팬들 중 이 명제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다.

호주로 돌아간 나는 로비 윌리엄스의 공연 알림을 켠 뒤 수시로 동향을 살폈다. 원더걸스는 해체했고, 린킨파크 또한 체스터의 죽음으로 종말을 맞았다. 이제 로비는 내 음악 인생의 시작을 대변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상징과도 같은 저 셋 중 아무도 실물로 보지 못 한다면 먼 훗날까지 그 상실감이 남으리라. 나는 로비를 기다렸고, 로비는 그 인내에 응답했다.

2017년 9월이었다.


새해가 밝은 뒤, 나는 공연에 약간은 흥미가 떨어져 무료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B'z 공연을 가긴 했지만 이전만큼의 환희와 감동은 더 이상 공연에서 느낄 수 없는 듯 했다. 처음 공연을 봤을 때의 그 열기, 그 충격에 아직까지도 매번 예매전쟁에 뛰어드는 것 아니었는가. 그런데 요즘은 매번 평가하고, 다른 공연과 비교하기에 바빠 공연 자체를 온전히 즐기지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비 공연도 큰 기대감이 없었다. 한국 웹에서 로비 공연 간 분의 후기를 보았는데, 지루하고 뻔하다느니 혹평일색이었던 지라 더욱 무드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가기가 귀찮아 침대에서 뒹굴기도 하고, 늙고 살쪄버린 왕년 가수 봐서 뭣하냐는 생각도 들고. 그러나 150불을 버릴 수는 없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이긴 그 곳. 1월에도 멜번에 있었어야 했는데...

로드 레이버 아레나는 평소와 똑같았다. 현수막과 포스터 한 장 없는 황량한 바깥풍경.
황인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내가 마이너한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 별 타격은 없었다.



원래 같으면 당연히 MD 사야 된다는 심정으로 샵을 기웃거렸겠지만 잔고에 70불 밖에 없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일단 지나침. 공연이 아주 훌륭하면 하나쯤 사겠지만 큰 기대는 안 했다.

나이 든 분들이 확실히 많았지만 그만큼 젊은 사람도 많았다. 로비가 아직까지 젊은이에게 어필하는 게 신기했지만 나도 젊은 축이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오프닝 밴드로 뱀부스가 등장했지만, 공연텐션이 한창 떨어진 나는 몸만 흔들며 올림픽 생각에 바쁨. 아 이상호 스노보드 진짜 감동이었는데... 이따 매스스타트 준결승 못 보는 게 아쉽네... 뭐 이런 생각이었다. 악기구성에서 볼 수 있듯, 재즈느낌 물씬 풍기는 훵크와 소울음악을 하는 밴드라서 역시 로비답다는 생각이었다.  




호주에서 스탠딩 공연을 볼 때는 자리선점이 필수적이다. 평균신장이 압도적으로 큰 것은 물론이요 여자 신장 또한 나보다 (173cm) 큰 경우가 심심치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방이 작은 자리를 어렵사리 선점해 좋은 시야를 확보했다.

주변의 로비팬들은 로비를 본다는 생각에 행복을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이었는데, 슈틸리케 닮은 내 옆자리 아저씨가 바로 그랬다. 콧수염 슬쩍 나서 공연 내내 웃음을 머금던 게 보는 나까지 흐뭇하게 만들고 말았다. 앞자리에 다소 시끄러운 진상팸이 있었지만 뭐 어떤가. 슈틸리케 아저씨 하나로 내 마음은 따끈해졌다.

휴대폰 4G도 안 터지는 바람에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거쳤다. 로비 형, 빨리 끝내고 갑시다. 좌석이 점점 채워졌고, 공연 즈음이 되자 빈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예매시작과 함께 매진이었던 로비의 인기를 다시 실감했다.



기다리는 중 스폰서 광고도 나오며 지루함을 식혀주고, 로비의 주제가인 'God Bless Our Robbie' 등장. 일부러 아무런 예습도 하지 않고 갔기에 모든 게 새로웠고 신선했다. 로비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구나. 여전히 공연장에선 아이돌이고 왕이었다.

진상팸이 슬슬 고개를 든 게 이 때 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휴대폰을 위로 치켜 올리고선 영상통화를 한다. 공연장 비매너가 죄라면 저건 징역 15년 정도. 화면에 집중하려는데 저 호주인 얼굴이 계속 튀어나와 도저히 집중을 못 했다. 슈틸리케 아저씨의 화도 아마 이 때 쯤 시작 된 듯. 여전히 다소의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드러난 정수리 부근에서 점차 김이 피어나는 듯 했다.

'God Bless Our Robbie' 중, 'USA를 제외하곤 월드와이드인 우리 로비'라는 가사가 있었는데,

표 안 팔려서 아시아 투어 취소한 걸 알고 있는 내겐 참 우스운 가사로 들렸다.
로비는 이 자리에 아시안이 없을 거란 생각을 버려야 했다. 어디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한바탕 찬가가 끝난 뒤 등장한 로비. 복서를 연상 시키는 오프닝으로 등장을 알린 로비의 모습은 옛날의 리즈 라이브를 연상 시켰다. 자리도 좋았고, 시야도 좋아 무대에 선 로비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제는 희끗한 머리를 다소 올렸으나, 그 포스나 아우라는 예전과 똑같았다.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로비 윌리엄스 공연은 나만의 토토가였다. 결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존재를 마주한 기분.

올림픽 생각으로 공연에 집중 못 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은 옛날의 영웅이 눈앞에 나타나자 하등 쓸모 없는 고민이 되었다.

이전부터 언급하는 '옛날의 삼대장', 그 중 가장 보기 힘든 존재는 단연 로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유일하게 실물로 확인한 존재는 결국 로비였다.

'The Heavy Entertainment Show'로 곧장 흥을 돋구는데 역시 아이돌 로비라 그런지 떼창이 만만찮았다. 모든 건 완성 되었다. 오래간 맛보지 못한 흥분이었다. 팔을 흔들던 로비의 삼두 부근이 넘치는 살로 떨려버려 좀 깨긴 했다만, 이제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The Heavy Entertainment Show'의 후속곡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Let Me Entertain You'였다. 10년을 넘게 들은 나만의 스테디셀러. 로비를, 그리고 내 삶을 상징하는 나만의 바이블. 익숙한 피아노 전주가 울려 퍼지자 나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미쳐 날뛰었다. 추억은 내면 깊숙한 곳의 전율을 일깨운다. One hand in the air, two hands in the air, 로비의 대사를 빠짐없이 줄줄 읊으며 이 기분이 평생 지속 되길 바랐다.

4년 전, 참으로 오랜만에 로비가 생각나 LMEY의 최근 라이브를 찾아 본 적이 있었다. 육중한 몸을 이끌고 코러스를 관객에게 넘기는 로비에게선 활기도, 혈기도 찾아 볼 수 없었더랬다. 유튜브 영상에 구슬피 '싫어요'를 누르고 빠져나온 나였는데, 영상은 실제와 비교를 불허했다.

 지금도 로비는 압도적이었다.


이제는 애아빠가 된 로비였지만, 적어도 공연장에서의 행실은 변하지 않아 실없는 농담과 욕설을 반복했다. 옛날의 악동은 여전히 악동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나의 로비는 변하지 않았다. 조금 지방이 늘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영웅"이라는 조지 마이클을 추모하며 'Freedom 90'을 부른 로비. 다른 공연이었다면 커버곡 부를 시간에 자기 곡 하나라도 더 부르라며 볼멘 소리를 했을 나였다. 그러나 로비에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기에. 같은 공간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데 치졸하게 무언가를 따지고픈 마음 따위 없었다.



로비는, "자신을 포함한 아빠들을 위한 노래"라며 신곡 'Love My Life'를 열창했다. 그리고 "너희들이 브리즈번보다 반응이 좋은 지 보겠다"며 타가수 메들리를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관객은 그의 신호 하나하나에 응답하며 남의 노래를 떼창했고, 로비와 하나가 되었다.

내가 중학생 때 샀던 로비의 베스트 앨범은 아직 내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내 스마트폰에 모조리 들어있다. 단골이라며 나를 예뻐하던 음반가게 "아저씨"에게서 가장 먼저 건네받은 앨범이었다. 그 앨범의 수록곡들이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시작은 'Come Undone'이었다.

아주 상스럽고, 부정적인 단어로 가득한 노랫말. 그러나 난 순간적으로 나의 옛날을 생각했다. 그 때는
모두가 아저씨였지만, 지금은 사회적 위치에 따라 예우를 표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 음반가게는 어느샌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가게를 잊고 살았다.

'Come Undone'을 들으며, 이제서야 여쭙는다. 사장님, 잘 지내시냐고.



진상팸은 여전히 손을 번쩍 치켜올리고 동영상을 찍느라 난리였다. 모두가 적당히 눈치를 보며 손을 반쯤 뻗지만 그들은 달랐다. 그야말로 뚝심이었다.

로비는 그런 카메라 세례에도 익숙한 듯 흔들림 없이 무대를 휘저으며 관객을 자극했다. 반경 10m 안에 그가 들어왔을 땐 나도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냈다. 아아, 로비. 내가 드디어 너를 봤다. 이 사실만으로도 2018년 2월 24일은 평생 기억에 남을 터였다.

"자신의 첫 번째 차트 1위 곡"이라며 부른 'Millenium', "너희들이 나의 카일리 미노그가 되어줘"라며 부른 'Kids'. 그의 베스트 하나하나가 가슴 속으로 다가와 예전을 떠올리게 했다. 중간엔 중년 남자관객을 무대 위로 올려 함께 발라드('Somethin' Stupid')를 불렀고, 그 뒤엔 자기 랩도 할 수 있다며 폭풍처럼 망한 'Rudebox' 앨범의 타이틀곡 'Rudebox'를 부르기도 했다.

로비의 모든 행동은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한 계산이었다. 역시 'Let Me Entertain You', 나는 남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제일 좋다. 로비는 그런 면에서 완벽한, 나에게 딱 맞는 사람이었다.

로비는 끊임없이 올라가기만 하던 분위기를 'Sweet Caroline'과 'She's the One'으로 가라앉히고, 이후 'Feel'과 'Rock DJ'로 다시 돋구었다. 떼창에 동참하며 말 그대로 로비와 함께 '호흡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 이상 내 기분을 잘 표현할 말은 없다.

레코딩으론 그렇게 좋아하지 않던, 그런 곡조차도 로비의 라이브에선 마술처럼 들렸다. 진정 오랜만에 느낀 기분이었다. 공연을 처음 보던 때의 나로 돌아가, 모든 걸 잊고 음악과 혼연일체가 되어 분위기를 받아 들이는 순간. 로비는 그런 존재였고 나는 아직도 그가 영웅이었다.



잠시 들어간 로비는 앵콜로 재등장해 'Better Man'과 'Angels'를 불렀다. 비교적 차분한 앵콜이었지만 그 분위기가 가라앉기 어디 쉬운가. 관객들은 여전히 흥분해 모든 곡을 따라하고, 로비가 마이크를 넘기면 더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워낙 이전이 강렬해서 그랬는지, 내게는 로비의 대표곡인 'Angels'가 나왔을 때도 왠지 모르게 그 분위기가 약해 보였다.

그 와중에도 팔을 치켜들고 동영상을 찍어대는 진상팸에게 슈틸리케 아저씨가 일침을 날린 것이 이때 쯤이었다. 아무래도 발라드 타임에도 집중이 깨지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진상 A씨의 등을 톡톡 두드리더니 실랑이를 벌이다가 상욕을 퍼붓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다말다 하다가 다시 로비에게 온 정신을 집중했다.

언젠가 또 볼 수 있길. 졸업 뒤엔 한국으로 돌아갈 내가 막연히 로비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오랜만에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공연이었다. 호주에서 간 공연 중 최고였음은 물론이다.

기대치가 낮았어서 그런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로비'라는 이름이 내게 워낙 특별한 의미를 지녔기에. 그래서 다른 이들에겐 평범한 퍼포먼스조차 의미가 되고 소름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누구는 생각보다 별로였고', '누구는 제법 공연 괜찮게 하더라'는 평가를 내리곤 했지만 이는 모두 의미 없는 말일 뿐이었다.

내게 특별한 아티스트라면, 무대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 크나큰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로비는 특별했다. 앞으로 로비 윌리엄스보다 더 특별한 아티스트의 공연을 볼 수 있을 지 잘 모르겠다. 대부분이 해체하거나 죽어서 돌아올 수 없기에. 그래서 나는 로비에게 고맙다.

솔로 아티스트라서 고맙고, 아직 죽지 않아서 고마웠다.
2월 24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 결국 나는 있는 잔고를 탈탈 털어 열쇠고리를 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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