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이 부족했다. 우울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의외로 화가 나지 않았다. 4년 전 알제리 참사를 돌이켜 보자. 2002년부터 월드컵을 본 나는, 매 대회 1승씩 챙기는 걸 너무나 당연히 여기곤 했다. 그래서 멘탈이 무너지고 선수 감독을 욕했으며, 세계에 비비지도 못한 국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런데 막상 이번엔 편안했다. 선수들도 최선을 다 했고 감독도 최선의 전술을 쓴 거라고 생각했다. 쿨병 오진다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국대가 아직 부족해서 진 거다. 이게 원래 우리의 월드컵 아니었나. 2002년에 너무나 잘 나가서 잠깐 황금기를 맞은, 한국축구의 현 주소.
'간절함'과 '투지'를 운운하며 선수를 폄하할 순 없다. 김영권은 지난 세월의 조롱을 털어내려는 듯 눈에 쌍심지를 켰다. "못 막으면 죽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김영권은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던졌고, 선제실점의 위기를 몇 번이나 막아냈다. 토트넘에선 전방에 대기하던 손흥민은 최후방까지 내려와 압박을 가했고, 김민우는 페널티킥을 허용한 뒤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렸다.
월드컵에서 선수의 열정 운운하는 게 어불성설이다. 모두가 간절하다. 단지 상대팀 또한 간절할 뿐이다. 모두가 월드컵에선 죽을 각오로 임하며, 한 골이라도 막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머리부터 내민다. 차이는 결국 실력에서 나왔다. 한국은 실력이 부족했고, 그래서 스웨덴에게 졌다.
패배에 화풀이 할 대상을 찾아서는 안 된다. 심판판정, 물론 아쉬웠다. 황희찬의 발을 밟은 스웨덴은 분명 경고를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심판이 바뀌었다고 결과가 바뀌었을까. 페널티킥은 정당했고, 한국은 유효슈팅을 하나도 기록하지 못 하며 자멸했다. 페널티킥을 허용한 선수는, 김진수와 박주호가 빠져 초토화 된 왼쪽 수비의 책임자였다. 출전부터 급작스러웠고 상황 또한 급박했다. 패스미스로 위기를 자초한 다른 선수는, 라인 컨트롤과 빌드업이 가능한 한국수비의 핵이었고 대체자 또한 없었다. 그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 진 게 아니다. 최선을 다 했지만, 부족해서 졌고 스웨덴보다 낫지 못해 졌다.
신태용 감독은 트릭이라는 유행어를 탄생 시키며 전력을 꽁꽁 감췄다. 결과적으로 실패가 되었지만, 나는 이게 조롱거리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줄부상으로 전력의 절반이 날아간 한국의 승률을, 조금이나마 높이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었다. 신 감독에겐 그게 최선이었고 전략이었다. 승리를 위해 노력한 감독을 욕해서는 안 된다. 전략의 실수를 비판할 순 있어도, 트릭 그 자체가 놀림감이 될 수는 없다. 여러모로 운이 따르지 않는 이번 월드컵. 부상이 쏟아지는데 경기 중에도 부상자가 나온다. 같은 조에는 세계 1위와 16강 단골 손님, 이탈리아를 꺾고 올라온 팀이 있다. 이 정도는 감안해 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화는 나지 않지만 우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새벽 여섯 시가 되어서야 잠들었고, 일어나서도 밥 차릴 생각조차 않은 채 전날 경기를 끝없이 복기했다. 한국은 졌다. 인정하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대패가 아님에 감사하고, 생각보다 괜찮은 스코어에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막상 아직까지도 우울하다. 부상만 없었으면, 그런 아쉬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지만 부상은 모든 팀이 겪는 숙명이었다. 우리 또한 헤쳐 나가야 했다.
기대가 덜 했는데도, 막상 지니까 우울한 이유는 뭐였을까. 화풀이 할 대상조차 없는 완벽한 패배. 한국에게 위기를 타개할 능력은 없었으며, 이제는 세계수준에 조금은 동 떨어진 팀이 되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막상 체감하자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인 것 아닌가 싶다. 앞으로는 국가대표에게 기쁨보다 슬픔을 느낄 일이 더 많을까. 아마 그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 같다.
멕시코는 강하고 독일은 더 강하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한 번만 기적을 일으켜 나의 걱정이 틀렸음을 입증해 주었으면 좋겠다. 스웨덴전은 시행착오고, 우리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각인 시켜 줬으면 좋겠다. 선수나 감독이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대한민국의 힘을 보여 주시길. 나는 언제나 응원한다. 설령 3패를 한다 해도, 나의 화풀이 대상은 사태를 이렇게까지 방치한 축구협회가 될 것이며, 선수나 감독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남은 두 경기도 파이팅.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말 밖에 없어 미안하다.